“침대축구”를 보면서 정치 경기를 생각하다

또 심판진이 대놓고 한쪽 편을 들어 불공정하고 부당한 판정을 내리면 경기는 난장판이 되기 십상이다. 심판도 사람인 이상 실수를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런 범위를 벗어난 판정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침대축구”는 심판의 의지로도 쉽게 줄일 수 있다. 예컨대, 아프다고 드러누웠으니 바로 밖으로 내보내거나 경고를 주고, 추가시간에는 “침대축구”로 지연된 시간의 세 배를 더 주는 관행을 도입한다. 한편 쓸데없이 양쪽 선수를 자극하고, 물리력으로 경기를 방해하는 관중도 구역질나게 한다. 한번 잘 했다고 영웅으로 치켜세웠다가 헛발질 한번에 역적으로 몰아붙이는 순진함은 그나마 양반이다. 술에 취해 물건을 선수들을 향해 던지거나 경기장에 들어가는 부류는 경기는 물론이려니와 모두의 안전을 해치는 악당들이다.

이 모두가 스포츠 자본주의나 상업화된 프로 스포츠의 정치경제학이다. 한편으로는 선수들이 꾸준히 기량을 연마하도록 격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경쟁을 통해 이기는 경기를 강요한다. 기량에 따라 선수의 품값이 매겨지고 승부에 따라 몸값이 정해지면서 놀이의 규칙(rules of a game)이 달라진 것이다. 축구가 관중을 위한 경기가 아니라 돈을 위한 경기가 된 것이다. 멋진 경기가 아니라 이기는 경기가 환영받는다. 관중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승리를 해서 돈을 챙기는 것이 “장땡”인 세상이 된 것이다. 각종 스포츠 관련 복권도 이런 돈잔치를 부추긴다. 갈수록 선수도, 심판도, 관중도 운동경기가 주는 참된 맛을 잊고 그저 돈을 바라볼 뿐이다.

“침대축구”를 보면서  정치 경기를 생각하다

이번 브라질 올림픽에서 한국 축구 대표단이 준결승전 진출을 놓고 온두라스 대표단과 경기를 치렀다. 경기 후반에 온두라스 선수가 공을 차넣어 0대 1로 한국 축구단이 패했다. 그런데 골을 넣은 후 온두라스 선수들이 걸핏하면 축구장에 드러눕거나 경기 진행을 방해하여 비난을 받았다. 전력이 한 수 아래로 평가되었던 온두라스에게 이리 허망하게 진 것에 대해 선수와 관중이 분노했다. 이른바 “침대축구”(grassrolling)에 대책없이 당한 것이다. 얼마 전에는 중동 국가와 치른 경기에서도 “침대축구”는 위력을 발휘했다. 온두라스와 중동 국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럽에서도, 심지어는 월드컵 경기에서도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만 티가 안나게 시간을 지연시키는 영리한 전략으로서 좀 덜 미운 “침대축구”일 뿐이다. 하지만 갈수록 “침대축구”는 적나라하고 구역질나는 양상이다. 추잡하기 그지없는 양아치짓이다. 경기 자체가 아니라 오직 이기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올림픽 금메달 정신줄이다. 정말 무조건 이겨야만 맛인가?

축구에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2002년 미국 유타주 Salt Lake City에서 열린 겨울올림픽에서 김동성 선수가 안톤 오노 선수의 “헐리웃 액션”으로 금메달을 놓쳤다(축구에서 헐리웃 액션은 골치거리가 된지 오래다). 2014년 러시아 Sochi에서 열린 겨울올림픽에서 김연아 선수가 심판진의 엉터리 판정으로 은메달을 받았다.  우리나라 선수만 피해를 당한 것은 아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우리나라가 금메달 12개로 단번에 4위에 올라섰지만, 군부독재정권의 무리수와 치부만 드러낸 성적이었다. 특히 남자 복싱 라이트 미들급에 나서서 Roy Jones Jr. 선수를 꺽고 금메달을 차지한 박시헌 선수는 그 참혹한 부끄러움의 정점에 있다. 한국인이 봐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3-2 판정승 아니었던가. 전두환 정권이 했던 것처럼 푸틴 정권도 체제유지를 위해 주최국의 이점을 악용하여 김연아 선수에게 횡포를 부린 것이다. 다 오십보 백보다.

탁구공을 치면서 운동하는 의미를 생각하다

언젠가 가까운 후배의 제안으로 탁구시합을 하게 되었다. 체육학과 선수출신에게 몇 달 동안 “레슨”이라는 특별교육을 받았다면서 설레발이다. 하지만 경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후배의 실력은 과연 “레슨”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후배의 기술은 한마디로 이기는 요령 몇가지일 뿐이었다. 특히 상대방이 치지 못할 만한 곳에 공을 보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상대방과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공을 맞추지 못하는 것을 보고 쾌감을 느끼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그 후배는 그 요령조차 숙달하지 못했고, 불행하게도 그 얄팍한 꼼수에 넘어가지 않는 상대를 골랐다. 경기랄 것도 없는 “탁구공 치기”가 끝난 다음에 나는 왜 기본기부터 다지지 않았는지를 물었다. 상대방을 골탕먹이는 것 말고 상대방과 탁구를 즐기는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는지 물었다. 상대방이 받아 치기 좋게 공을 보내면 기본기도 단련이 되고 서로 주고 받기가 길게 이어지면서 즐거움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상대방이 치기 좋은 곳에 공을 맘대로 보낼 수 있다면 언제든 치기 어려운 곳에 원하는 대로 보낼 수 있는 법이라고 했다. 그 후배는 그런 사람됨과 운동의 기본을 교육받지 못하고, 그저 이기는 기법만 전수받은 셈이다. 이른바 “레슨”이라는 엉터리 프로페셔널리즘이다.

그러면서 나는 운동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운동을 하는지를 자문한다. 운동이라는 것은 묘하다. 하루하루 자신을 단련하여 기량이 늘어가는 즐거움이 있다. 자신의 손과 발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그런 희열이 있다. 우아한 발차기가 제대로 들어가고, 찬 공이 자로 잰 듯이 날아가 꽂히고, 곡예하듯 던진 공이 그물 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그런 감흥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재주를 보고 마치 자신이 한 것처럼 흥분하게 된다. 이심전심으로 감정이입이 된다. 텔레비젼에서 중계되는 격투기나 축구나 농구를 보는 재미가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응원하는 선수든 아니든 상관이 없다. 하물며 서로의 기량을 겨루는 경기에 직접 나서서 생생한 긴장과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일임에랴… 땀을 흠뻑 흘린 후에 상대방과 동지의식을 느끼거나 더 친밀한 감정을 갖는 것은 자연스럽다. 진정으로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 얘기다. 어쩌면 선조들도 활쏘기를 하면서 이런 느낌을 나누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활쏘기는 자기 자신과 겨루는다는 점에서 선수들이 몸으도 부대끼는 격투기나 축구와는 다르다.

이런 생각을 해서인지 어느 경기에서든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없거나 기량이 아닌 꼼수로 일관하는 선수들을 나는 남달리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우리 선수들이 “침대축구”를 한대도 마찬가지다. 또한 판정이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운 심판진과 욕설을 쏟아내고, 술병을 던지고, 경기장에 난입하는 난동꾼도 곱게 보아주지 못한다. 모두 경기를 망친다는 면에서 차이가 없다. 승리감을 누릴 권리가 없는 자들이고 아예 경기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경기를 즐길 만한 깜냥이 안되는 뒷골목 잡배들이다.

축구 경기의 주인인 관중이다

“침대축구”를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과연 누구를 위한 축구일까? 과연 잔디밭에 드러눕는 선수들이 문제일까? 심판이 잘못한 것일까? 아니면 객석에서 축구를 구경하는 관중들 탓일까? 그러면서 나는 답답하기만 한 정치 상황을 연상하게 된다.

축구경기에 관련된 사람들은 누구일까? 먼저 양쪽 선수들이 있고, 경기를 진행하는 심판진이 있다. 방송으로 경기를 중계하고 해설하는 사람이 있다. 끝으로 경기를 보러 오거나 텔레비젼을 통해 시청하는 관중이 있다. 축구는 관중과 시청자들이 내는 돈(광고포함)으로 운영이 된다. 양쪽 선수들이 기량을 닦아 정해진 규칙에 따라 정정당당하게 겨뤄야 한다. 심판진도 규칙을 합리적으로 적용하여 불편부당하게 경기를 진행해야 한다. 해설자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 관중(시청자)은 그런 멋진 경기를 즐기면서 댓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것이다. 결국 축구경기의 수요자는 관중이며, 축구경기는 그들을 위해 열려야 한다.

그런데 선수들이 기량을 닦지 않고 잔재주로 일관하면 어떻게 될까? “동네축구”와 “뻥축구”와 “헛발질 축구”를 누가 즐기겠는가? 기량과 경험은 있으나 정당하게 사용하지 않고 남용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침대축구”든 “헐리웃 액션”이든 선수들이 요령만 피운다면 무슨 즐거움이 있겠는가? 심판의 눈을 속여 상대방을 걷어 차고, 팔꿈치로 찍고, 시비를 걸어 화나게 하고, 손으로 공을 잡고, 반칙을 당했다며 뒹구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실력이 부족한데도 안간힘을 쓰면서 상대방을 붙잡고 늘어지는 모습은 그나마 애처로움이라도 있다. 재능을 다 가진 자가 쓸데없이 공을 돌려 시간을 끌거나 거짓으로 상대방과 심판진을 속이는 모습은 역겨움 그 자체다. 하물며 돈을 받고 경기 결과를 조작하는 일임에랴…

또 심판진이 대놓고 한쪽 편을 들어 불공정하고 부당한 판정을 내리면 경기는 난장판이 되기 십상이다. 심판도 사람인 이상 실수를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런 범위를 벗어난 판정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침대축구”는 심판의 의지로도 쉽게 줄일 수 있다. 예컨대, 아프다고 드러누웠으니 바로 밖으로 내보내거나 경고를 주고, 추가시간에는 “침대축구”로 지연된 시간의 세 배를 더 주는 관행을 도입한다. 한편 쓸데없이 양쪽 선수를 자극하고, 물리력으로 경기를 방해하는 관중도 구역질나게 한다. 한번 잘 했다고 영웅으로 치켜세웠다가 헛발질 한번에 역적으로 몰아붙이는 순진함은 그나마 양반이다. 술에 취해 물건을 선수들을 향해 던지거나 경기장에 들어가는 부류는 경기는 물론이려니와 모두의 안전을 해치는 악당들이다.

이 모두가 스포츠 자본주의나 상업화된 프로 스포츠의 정치경제학이다. 한편으로는 선수들이 꾸준히 기량을 연마하도록 격려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한경쟁을 통해 이기는 경기를 강요한다. 기량에 따라 선수의 품값이 매겨지고 승부에 따라 몸값이 정해지면서 놀이의 규칙(rules of a game)이 달라진 것이다. 축구가 관중을 위한 경기가 아니라 돈을 위한 경기가 된 것이다. 멋진 경기가 아니라 이기는 경기가 환영받는다. 관중들에게 욕을 먹더라도 승리를 해서 돈을 챙기는 것이 “장땡”인 세상이 된 것이다. 각종 스포츠 관련 복권도 이런 돈잔치를 부추긴다. 갈수록 선수도, 심판도, 관중도 운동경기가 주는 참된 맛을 잊고 그저 돈을 바라볼 뿐이다.

정치 경기의 주인은 백성이다

이런 면에서 축구 경기는 민주주의 정치 경기와 비슷하다. 경기장은 의회나 국회다. 양쪽 선수들은 말하자면 여당과 야당 의원들이다. 백성들이 기대하는 정책을 갈고 닦아 의회에서 경쟁하여 자신들의 정책을 민다. 심판진은 대통령과 행정부에 해당한다.1) 당파성에서 벗어나 합리성을 따져 일을 추진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언론과 시민사회도 정치를 논평하며 여론을 이끈다. 축구에서 관중이 있다면 정치에서는 백성이 있다. 그들이 투표를 해서 대표들을 의회로 보내고 세금을 내어 심판진을 먹여살린다. 따라서 민주주의라는 정치 경기는 당연히 백성들을 위해서 치러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들이 경험하는 정치 경기는 교과서에 적힌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일단 선수들의 기량이 편차가 큰 가운데 수준 미달인 경우가 허다하다. 그들의 배경과 이해관계가 백성들과는 거리가 멀다. 세금을 떼어먹고, 군복무를 하지 않고, 범죄를 저지른 비율이 현저하게 높다. 전문 지식은 커녕 일반 상식도 갖추지 못한 자들도 적지 않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듣고, 그 좋고 나쁨을 평가해서, 나름의 의견을 정리하고, 그것을 조리있게 말해서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자가 드물다. 허구헌날 “뻥축구”에 “헛발질”이니 백성들이 볼 때도 그저 딱하고 안쓰러울 뿐이다.

개중에 말이나 좀 하는 부류들은 잔머리를 굴려 상대를 속이고 골려먹는 술수를 부린다.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아 누명을 씌우고, “헐리우드 액션”으로 국면을 뒤바꾸고 “침대축구”(필리밥스터)로 의사진행을 방해한다. 기량이 준수하고 멀쩡한 의원도 이런 판에서는 도매금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다. 당선이 급하고 공천이 포도청이니 센  놈편에 줄을 대고 건달들 마냥 패거리질을 한다. 멋진 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마음껏 펼칠 수가 없다. 자유롭게 토론을 하고 합리성에 따라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머리끄댕이 잡고 아귀다툼을 하는 삼류 “동네축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나 총리나 정부 관료들은 정파를 떠나서 합리성에 따라 행정을 해나가야 한다. 그런데 행정부가 여당편을 들어 정치를 하게 되면 정치 경기는 망가지게 된다. 대통령이 여당을 지배하든, 여당이 대통령의 등에 올라타 채찍질을 하든 정치 경기가 벌어지는 의회는 개판이 된다. 여당이 다수가 되면 행정부를 등에 업고 야당이 뭐라 하든 일당 독재를 강행할 것이고, 야당이 다수가 되면 여당과 행정부는 구석에 몰려 발버둥칠 것이다. 두 경우 모두 멀쩡한 행정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독재정권은 의원들을 줄세워 통제할 뿐만 아니라 관료들을 줄세워 “기강”이라는 이름으로 정치를 강요한다. 여당이 아무리 반칙을 해도 호루라기를 불지 않고 야당에게는 잘못한 것이 없어도 노란딱지와 빨간 딱지를 아끼지 않는다. 언론과 시민사회까지 겁박하고 길들이기를 시도한다. 심판의 판정에 의문을 제기하면 유언비어 유포나 빨갱이라고 몰아붙인다. 또한 여당과 야당이 졸전을 거듭하면서 정부관료제를 견제하지 못하면 관료의 독재로 이어진다. 입법부는 입법부의 논리가 있고 행정부는 행정부 나름의 논리가 있는 법인데, 그 구분이 없이 승자가 독식을 하게 되면 민주주의는 없는 것이다.

정치가 백성들의 위한 경기인 만큼 궁극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도 백성이다. 하지만 백성들도 정치 경기에 제 몫을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아는 것이 없으면서 정치라는 말만 나오면 욕부터 내뱉으면서 미주알 고주알 훈수를 두는 사람들이 많다. 축구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으면서 경기가 잘 안풀리면 터무니없이 선수를 힐난하고 감독을 비난하는 사람들과 똑같다. 선수가 그렇게 쉬운 골기회를 날려버렸다고 발을 동동 구르고, 감독이 용병술이 없다며 누구를 빼고 누구를 넣으라고 악다구니를 쓴다. 자신은 공을 몰고가는 것도 골대 안으로 차넣는 것도 형편없으면서 선수값을 하라며 다그친다. 토론회든 공청회든 눈꼽만한 관심도 두지 않고 투표장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사람들이 정치를 혐오하고 정치인을 저주한다. 주인이, 주권자가 바로 자신임을 스스로 부정하는 어리석음이자 누워 침뱉기다.

또한 예산은 먼저 빼먹는 놈이 임자라며 공직자들에게 이런 저런 압력을 넣는 사람도 있고,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여기 저기를 기웃거리면서 주머니를 채우는 사람도 있다. 영문도 모른 채 모임에 가서 정치인에게 밥과 술을 얻어 먹고 선물을 받는 것은 차라리 순진하다. 돈을 받고 집회에 잠석하거나 반대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드물게는 용팔이 사건처럼 정치인의 하수인이 되어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맘에 들지 않는다고 깡통을 던지거나 운동장으로 내려가 난동을 부리는 자들과 다를 바 없다. 정치를 왜곡하고 망가뜨리는 자들이다. 나쁜 정치가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에 대한 백성들의 혐오를 가중시키고 정치판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데 한 몫을 담당한다.

경제라는 경기도 비슷하다. 경제라는 운동장에서 뛰는 선수들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혹은 자영업자다. 심판은 정부 (입법, 사법, 행정부) 혹은 시민사회이다. 경제를 지켜보면서 즐기는 관중은 소비자들이다. 하지만 “갑질”로 표현되는 대기업의 횡포는 경제라는 운동장이 처음부터 기울어져 있음을 말한다. 말하자면 프로 선수와 초등학교 선수들의 경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경제에서는 “침대축구”든 “헛리웃 엑션”이든 대기업의 전유물이다. 약육강식 논리 그대로다. 이런 불공정한 경기를 막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다. 바다에 플랑크톤이 없으면 멸치도 없고 조기도 없는 것처럼(2008: 675), 중소기업이 없으면 대기업이 위태롭다. 그래서 정부와 대기업은 공생을 외치지만 그때 뿐이고 “갑질”은 쭉 계속된다.

주인인 관중과 백성이 하기 나름이다

축구나 정치에서 추잡한 반칙, “침대축구,” “헐리웃 엑션”을 뿌리뽑으려면 관중과 백성들이 나서야 한다. 그들이 경기의 주인이고 정치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관중과 백성의 수준이 경기와 정치의 수준을 결정한다. 정치인과 공직자는 백성들의 심부름꾼이다. 이런 영악한 머슴을 제대로 부리려면 주인이 부지런히 공부하고 열심히 행동해야 한다. 말하자면 주인값을 해야 한다.

관중이 경기를 즐길 줄 알아야 하듯이, 백성도 정치 결과에 상심하지 말고 정치 과정에 관심을 갖아야 한다. 공부하고 생각한 대로 시시비비를 가려서 반칙왕을 퇴출시켜야 한다. 신중하게 토론을 지켜보고, 공청회에 참석하고, 투표에도 참여해야 한다. 그래야 머슴들이 주인을 얕보지 않는다. 또한 정당이나 시민단체에 후원금도 내고 원하는 것을 말하는 주인의 행동이 필요하다.

각주
1)  물론 입법부가 행정부를 통제하기 때문에 심판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지만, 정치가 입법부에서 이루어지는 점에 비추어 보면 정치 선수들은 여당과 야당이고 불편부당해야 하는 심판은 행정부에 가깝다.

원문:  박헌명.  2016.  “침대축구”를 보면서 정치 경기를 생각하다.  <최소주의 행정학>  1(8):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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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와 올림픽 금메달 정신줄

“죄송합니다”와 올림픽 금메달 정신줄

브라질의 리우 데 자네이루에서 지난 8월 5일부터 21일까지 여름올림픽이 열렸다. 흔히 올림픽을 4년마다 열리는 지구촌 축전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런 감흥은 예전만 못하다. 언제부터인가 연례행사인 것처럼 그냥 때가 되면 텔레비젼 앞에서 보는 둥 마는 둥 시간을 죽이곤 한다. 왜 똑같은 경기를 지상파 방송사에서 동시에 중계를 하는지 알 수 없다. 우병우와 THAAD 사태를 잊고 박근혜를 더 이상 비난하지 말라는 뜻인가? 박정희 전두환 시절마냥 국민들 모두 텔레비젼 앞에 앉아 애국심으로 선수들 응원이나 하라는 뜻일까?

왜 “죄송합니다”인가?

남자 10미터 공기권총 경기에서 5위를 차지한 진종오 선수가 기자회견을 “죄송합니다”로 대신하고 자리를 뜨는 장면이 생각난다. 올림픽을 포함한 세계대회에서 탁월한 실력으로 정상을 지켜온 선수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경기에서 진 다른 선수들도 비슷한 모습이었다. 준결승전 진출에 실패한 여자배구 선수들도 “죄송합니다”라고 사죄했다. 경기에서 부진했던 박정아 선수는 십자포화같은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왜 그들은 죄송한 것일까? 왜 석고대죄를 하듯이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소위 세계 랭킹에 비추어 선수들의 기대치를 매긴다. 성적이 기대치를 웃돌거나 금매달을 따면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된다. 그 기대치에 못미치면 그 격차만큼 비난이 쏟아진다. 기대치가 금매달인 선수가 매달을 따지 못하면 반역을 도모한 죄인 취급을 받는다. 기대치와 경기 결과가 메달과 상관없는 선수들은 아예 주목을 받지도 못한다. 필명 “ 버락킴너의길을가라”는 지난 8월 10일 “금메달을 획득하면 그때부터 대한민국의 아들, 딸로 호명되며 추앙받지만, 패배하는 순간 그들은 버려진 사생아(?)쯤으로 취급된다는 점이다. 나라를 구한 위대한 영웅과 국민에 실망감을 안긴 죄인 그 극단적 위치를 오가야 하는 대한민국 스포츠 선수들…”이라고 적었다(http://www.ziksir.com/ziksir/view/3564).

금메달 정신줄과 올림픽 헌장

결국은 메달이다. 그것도 금메달이다. 종합순위를 따지는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아무리 은메달이 많아도 금매달 하나를 이기지 못한다. 그러니 무슨 수를 쓰든 금메달을 따고 볼 일이다. 공을 차든, 뜀박질을 하든, 헤엄을 치든, 철봉에 매달리든, 골프공을 치든 상관이 없다. 아마도 방귀뀌기나 눈알굴리기에서 일등을 해도 환호할 것이다. 하다못해 도둑질이나 성추행을 잘해서 금메달을 땄다 해도 환장들을 할 것이다. 이러니 출산율 최저, 자살율 최고, 입양아 수출 최고 등은 금메달만 받는다면 국가의 자랑으로 내세울 판이다. “금메달 정신줄”이다. 금메달병이다. 무슨 짓을 해서든 금메달만 따면 그만이라는 것 아닌가.

현대 올림픽은 19세기 말 쿠베르탱(Coubertin)이 주창하여 시작되었다. 올림픽 헌장(Olympic Charter)의 기본
원칙(Fundamental Principles of Olympism)은 올림픽이 즐겁게 힘쓰는 것, 좋은 교육적 가치, 보편적인 기본 윤리원칙에 대한 사회적 책임과 존중을 추구한다고 했다(“Blending sport with culture and education, Olympism seeks to create a way of life based on the joy of effort, the educational value of good example, social responsibility and respect for universal fundamental ethical principles.”). 올림픽 정신은 상호 이해, 우정, 결속, 깨끗한 경기를 강조한다(“… in the Olympic spirit, which requires mutual understanding with a spirit of friendship, solidarity and fair play.”).

과연 금메달 정신줄이 즐거운 마음으로 힘써 경기에 임하고 우정으로 서로를 이해하도록 하고 있는가? 선수들이 상호 결속을 다지고 깨끗한 경기를 하게끔 하는가? 경기에서 지거나 메달을 따지 못하면 국민들에게 석고대죄하듯 죄송해야 하는 선수들에게 우정, 상호 이해, 결속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금메달을 목에 걸지 않고서는 영웅이 될 수 없고 박수를 받을 수 없는 정신줄에서 어떠한 교육적 가치와 윤리원칙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신체, 의지, 마음을 고양하고 균형있게 묶어내는 삶의 철학(“Olympism is a philosophy of life, exalting and combining in a balanced whole the qualities of body, will and mind.”)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행여 “더 빨리, 더 높게, 더 힘차게”(Citius, Altius, Fortius)라는 올림픽 표어가 무한경쟁을 부추기고 금메달 정신줄을 강요한 것은 아닐까?

3S운동과 금메달 정신줄

3S는 Sex, Screen, Sports를 말한다. 흔히 나쁜 정권이 일반 국민들을 타락시키기 위해 권장하는 것이다(이문영 1991: 97). 백성들이 현실과 정치를 깨닫고 판단하지 못하게끔 관심을 돌리려는 공작이다. 매일매일 닥치는 일상과 이웃에 관심을 끊고 공공집회에는 걸음을 끊는다. 벗고 찍고 보는 일에 몰두하고, 영화관에 몰려가고, 경기장의 응원물결에 휩쓸린다. 카지노와 (화상) 경마장이 주택가에 스며든다. 길거리와 인터넷에서 복권과 노름이 독버섯처럼 자란다. 백성들은 성실한 삶을 포기고 현실에서 도피하여 환상과 도박에 빠지게 된다. 바로 독재자가 원하는 상황이다.

독재정권은 정치정당성이 없다는 열등감을 끝까지 이기지 못한다. 그래서 치명적인 약점을 덮고 백성들의 지지를 얻을 만한 일을 찾는다. GNP를 올리는 경제사업을 추진하고 4대강사업같은 큰 토목사업을 일으킨다. 무언가 손에 잡히고 눈에 확 띄는 그런 “바벨탑”을 쌓아야 한다는 강박이다. 또 민족과 국가의 우월성과 자긍심을 드높인다면서 선전에 열을 올린다. 정권이 잘하고 있다고 백성들을 세뇌하려는 것이다. 이런 공작에는 스포츠 경기가 제격이다.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이 프로 야구, 축구, 씨름을 출범시키고, 88올림픽을 강행한 것이 대표사례이다.
금메달 정신줄, 메달 지상주의, 스포츠 국가주의는 3S의 한 축이다. (1) 체력은 국력이라면서 백성들을 동원한다. 시간에 맞춰 온 백성들을 줄세워 국민체조를 하도록 강요한다. (2) 경기 성적이 국가의 경쟁력이 된다. 올림픽 종합 순위가 민족의 우수성 순위이고 국력 순위가 된다(버락킴너의길을가라 2016). 올림픽 10위를 내세우는 이유가 이것이다. (3) 따라서 경기를 개인이 아닌 국가의 일로 치환한다. 스포츠는 국가사업이 되고 소위 “엘리트 스포츠”를 지향한다. 선수 개인의 영광이 국가의 영광으로 둔갑된다.

이번 올림픽에서 박근혜  정권은 금메달 10개, 종합 10위를 목표로 내세웠다. 은메달과 동메달은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다. 국가에서 예산을 지출하여 선수들을 훈련시킨다. 선수들이 금메달을 수확해오기를 기대한다. 국민의 성원에 보답하고 국위를 선양하여 나라에 충성하는 길이라 강조한다.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대통령이 직접 전화를 하거나 축전을 보낸다. 민족의 우월성과 국가의 힘을 과시했으니 얼마나 통치자가 흥이 났을 것인가? 금메달을 딴 선수들은 영웅으로 추앙되고 온갖 혜택을 받는다. 이런 면에서 박근혜와 김정은 정권은 다를 바 없다. 박정희, 김일성, 전두환, 노태우, 김정일 정권 모두 이런 금메달 정신줄로 백성들을 현혹해왔다. 그들이 말하는 국민과 민족과 국가는 사실 통치자 자신일 뿐이다. 우월성과 자긍심은 금메달이라는 마약이 그려낸 환영이다.

이러한 금메달 정신줄은 올림픽 헌장을 거스르고 있다. 올림픽 헌장 제 1장 6조 1항은  올림픽 경기가 개인이나 집단의 경쟁이지 국가 간의 경쟁이 아니라고 못박고 있다(“The Olympic Games are competitions between athletes in individual or team events and not between countries.”). 하지만 현실은 아직도 시상식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의 국기가 걸리고 국가가 연주된다.

금메달 정신줄의 정치경제

이러한 금메달 정신줄에서 올림픽의 기본원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지구촌 축전이라지만 선수들은 경기 자체보다는 경기 결과에 목맬 수 밖에 없다. 결과에 따라 영웅과 죄인이 결정되고, 특혜와 무관심이 갈리기 때문이다. 금메달을 따내면 부와 명예가 한꺼번에 주어지지만, 실패하면 아무 것도 손에 쥘 수가 없기 때문이다. 포상금과 연금이 달린 문제이니 죽기 살기로 금메달을 매달릴 수밖에 없다. 깨끗한 경기가 아니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는 경기를 해야 한다. 비열한 반칙과 행위는 잠깐이고 금메달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선수라기보다는 금메달을 생산하는 기계에 가깝다. 인간이기보다는 금메달을 물어오는 사냥개에 가깝다. 자의든 타의든 사생활을 잊고 불타오르는 애국심과 사생결단의 각오로 금매달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이기면 나라를 구한 영웅이 되고 지면 패장으로 목을 내놔야 하기 때문이다. 엘리트 스포츠에서 메달을 따지 못하면 인생은 무의미해지고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금메달 정신줄을 가진 단체와 국가가 선수에게 원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금메달이다. 그만큼 치열한 경쟁을 거쳐 선수를 선발하고 파격에 가까운 지원을 해준다. 자동판매기에 동전을 넣고 원하는 음료수를 선택하여 빼먹는 식이다. 전투를 하듯이 훈련을 하고 전쟁을 하듯이 경기를 하도록 선수들을 다그친다. 군사작전을 전개하듯이 자세한 계획을 세워놓고 선수들을 닥달한다. 독재정권일수록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으로 조바심을 가진다. 짧은 시일 내에 성과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금메달을 사냥해 온 선수들에게 넉넉한 보상을 던져주고, 금메달은 단물이 다 빠질 때까지 밤낮으로 울궈먹는다.

금메달에 사로잡힌 백성들도 흥겨운 마음으로 축전을 구경하기 어렵다. 이기고 지느냐에 몰두하기 때문에 경기 자체를 즐기기 어렵다. 손에 땀을 쥐는 경기라는 표현은 승패에 목을 건다는 뜻이다. 나라의 명운을 건 전쟁을 바라보면서 승리를 염원할 뿐이다. 이긴 쪽에서는 잔치집이 되고 진 쪽은 초상집이 되는 판이니 어찌 숨돌릴 짬이 있겠는가. 승리한 선수는 영웅이라 부르고 온갖 찬사를 쏟아낸다. 패배한 선수는 죄인으로 낙인찍고 온갖 비난을 쏟아낸다. 하지만 이것은 경기 자체가 아닌 결과에 대한 평일 뿐이다. 박정아 선수에게 비난을 쏟아낸 사람들이 얼마나 배구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몇 번이나 배구경기를 관람했는지 의심스럽다. 물론 금메달 정신줄에서는 전문가인지 문외한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경기에서 이겼는지, 금메달을 땄는지를 묻기 때문이다.

승패는 민족과 국가의 우월성과 무관하다

경기에서 승패는 피할 수 없다. 이기는 것과 지는 것은 일상이다. 동전의 양면이다. 하지만 승패는 경기의 결과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기는 것이 옳고 지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승패가 선수들의 인격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승패가 아니라 경기 그 자체다. 경기에 최선을 다하면서 즐거움을 얻고, 우정을 쌓고, 인격을 닦고, 또 체력을 다지는 것이다.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선수들의 실력만이 아니다. 그 날의 날씨 (비, 바람, 온도, 습도 등), 선수의 건강상태, 경기장과 장비 상태, 경기장 분위기, 심판의 판정 등이 영향을 미친다. 우연이라거나 운(random error)도 무시할 수 없다. 사람들이 말하는 기대치라는 것은 평균 개념이다. 가장 높은 확률을 보이는 사건을 말한다. 세계랭킹 1위라면 그 선수가 금메달을 딸 확률이 가장 크다는 말이다. 확실히 금메달을 딴다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경기는 예측할 수는 있어도 누가 이길 것인지 미리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승패에 대한 지나친 환호와 비난은 무지와 천박 그 자체다.

한편 인구수를 고려하면 한국의 성적은 놀랍다. 남한의 인구가 5천만명인데 이번 올림픽에서 일본(1억2천만), 독일(8천만), 프랑스(7천만), 이탈리아(6천만)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14억명의 중국이 금메달 26개로 종합 3위를 차지했다. 중국은 천만명당 금메달 0.19개 (=26/140)인데, 한국은 1.8개 (=9/5)를 획득했으니 한국이 10배 더 잘 한 셈이다. 엇그제 월드컵 축구 예선경기에서 한국이 중국을 물리쳤다. 개개인의 축구능력분포가 두 나라 모두 같다고 치면 2천 5백만명 (남자축구니깐)에서 11명을 뽑고, 7억만명에서 11명을 뽑아서 경기를 벌인 결과가 “공한증”이었다. 하지만 이 결과가 조선족이 한족보다 낫다거나 한국이 중국보다 강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한국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을 가끔씩은 안쓰럽게 생각한다. 현대 올림픽의 경기종목은 대개 서구에서 보편화된 것이고, 서구 사람들의 체격과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체형과 체력으로 봐도 한국인은 서구인에 미치지 못한다. 애초부터 올림픽은 동양인에게는 불공정한 경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높은 순위를 차지한다는 것이 맘을 아프게 한다. 금메달만 쫓는 정권과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학대에 가까운 훈련을 감내하는 선수들이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더 크고 빠르고 힘센 경쟁자를 이기려고 불나방처럼 달려들어 악다구니를 치고, 부딫히고, 넘어지고, 피흘리고, 이를 악무는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경기 그 자체를 즐기고 싶다

경기는 이기고 지는 자를 가린다. 하지만 겨루는 행위 자체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승패에만 몰입한다면 슬픈 일이다. 하물며 승패로 선수들을 얽어매고 백성들을 호도하는 일임에랴… 겨루는 그 자체를 즐기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상식으로 돌아와야 한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국가의 운명이 달렸다는 한 판 승부를 보고 싶지 않다. 사격이든 배구든 좋아하는 경기 그 자체를 느긋한 마음으로 즐기면서 선수들을 응원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경기에서 진 우리 선수들이 어깨를 떨구고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일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진종오도, 김잔디도, 김우진도 죄송할 필요가 없다. 김연경도 박정아도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 최선을 다해 재주를 겨루는 모습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좀 흉하게 내지르는 김연경의 괴성도, 양효진의 얌전한 오리궁뎅이도, 실수를 연발했다는 박정아의 서브리시브도 그저 예쁠 뿐이다. 이제 그만 국가라는 짐을 내려놓으라. 승패에 목을 매는 태극전사의 투혼은 잊으라. 그저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즐겁게 마음껏 펼쳐라. 그런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을 나는 보고 싶다.

원문:  박헌명.  2016.  “죄송합니다”와 올림픽 금메달 정신줄.  <최소주의 행정학>  1(8):  1-2

기본

비폭력은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다

정태춘은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에서 “우리는 신선한 노동의 오늘 하루 우리들 인생에 소중한 또 하루를 이 강을 건너 다시 지하로 숨어드는 전철에 흔들리며 그저 내맡긴 몸뚱아리로 또 하루를 지우며 가는가… 우리는 이 긴긴 터널 길을 실려가는 희망없는 하나의 짐짝들이여서는 안되지. 우리는 이 평행선 궤도 위를 달려가는 끝끝내 지칠 줄 모르는 열차 그 자체는 결코 아니지 아니지 우리는…”라고 노래했다. 그는 92년 장마를 받아낸 종로에서 무더위처럼 답답하고 끈적거리는 우리의 하루살이를 그렇게 느꼈던 모양이다.

”헬조선”이란 전철에 내맡긴 몸뚱아리

이른바 “헬조선”이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아우성으로 들리는 시절이다. “갑질”로 상징되는 가진 자의 폭력이 난무하는 약육강식 속에서 힘없는 자들이 하루하루를 아등바등 살고 있다. 너나없이 벌어먹고 살기가 빡빡해졌다. 동무가 일하는 회사로 찾아가 반갑게 저녁을 먹고 술한잔 걸치는 일은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컴퓨터와 손전화가 보편화되고 먹을거리가 널려있건만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유와 웃음보다는 긴장과 짜증이 묻어난다. 누구나 시간에 맞춰 기계처럼 쉴 새없이 움직이도록 서로를 얽어매고 있다. 서로가 부담을 권하고 술을 권하는 사회가 되었다. “선한 꾀부림”도 허락되지 않으니 생산성은 높아졌을 망정 인심은 각박해질 수밖에 없다.

나 살기도 바쁜데 남에게 눈길을 줄 틈이 어디 있을까. 출퇴근 시간에 사람들이 무엇에 쫓기듯, 무엇에 이끌리듯이 우르르  몰려가고 몰려오는 모습에서 나는 가지지 못한 자들이 “전철에 내맡긴 몸뚱아리”와 그들의 “희망없는 짐짝”을 본다. “긴긴 터널 길”에는 코딱지만한 여유도 없이 장마철의 무더운 열기에 헐떡이는 사람들 뿐이다. 그 헐떡임이 서로에게 열기가 되어 서로의 숨을 옥죄고 있다. 사는 것이 아니라 아귀다툼 속에서 순간 순간 숨을 참고 쉬면서 버티는 것이다.

“묻지마” 범죄와 참지 못하는 사회

지난 수년 간 “묻지마” 혹은 “홧김에” 범죄로 많은 사람들이 이유도 모른채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힘센 자들이 설계하고 추진한 무한 경쟁에서 뒤쳐지고, 상처받고, 고통받고, 끝내 내쫓긴 자들의 마지막 몸부림인 것같아 안타깝다. 약육강식이라는 야만스런 본질을 교묘하게 감춘 경쟁력(국제화)이라는 허울이 아니던가. 가해자들은 숨이 차오를 때까지 차올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솟구치는 분노를 삭힐만한 기회도 여유도 없으니 더 이상 멀쩡한 정신줄로는 버텨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 뿐만 아니라 각자가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조금이라도 신경을 건드리면 바로 터질 것같은 폭탄이 되어 전철에 몸을 싣고 있다.

힘센 자들은 멀찍이서 경마를 즐기듯 약자들만의 무한 경쟁을 즐길 뿐이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지칠대로 지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서로 비난하고 칼부림하는 광경을 흡족스레 바라볼 뿐이다.  집값을 올려놓으면 아파트 분양권을 두고 아귀다툼이고 치솟은 전세보증금을 채워넣느라 가쁜 숨을 헐떡여야 한다. 말이 가계대출이지 정권이 빚을 내라고 권하고 대부업체가 밤낮으로 광고질이다. 너도 나도 빚더미에 코를 꿰어 버둥거리고, 가진 자들은 고리대질로 잔치판을 벌인다. 모두가 즐기는 축전祝典이 되지 못하고, 한쪽은 잔치판이고 다른 쪽은 줄초상인 축제祝祭가 된다.

이렇게 가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을 구석에 몰아놓고, 잠시도 여유를 갖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못살게 굴고, 그들끼리 옥신각신하다가 서로 반목하고 싸우게 하는 이유가 있다. 약자들이 합리성과 인내를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힘센자의 “갑질”(힘센자가 바로 그들의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참지 못하고 서로 폭력을 사용하도록 부추기기 위함이다. 그래야 강자들이 독식하는 약육강식과 “갑질”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소정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를 새삼스레 생각하게 된다.

장승, 비폭력, 그리고 참는 것

선생님의 초월윤리를 처음 접한 사람들은 아마도 “공자왈 맹자왈” 쯤으로 생각할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얘기를 구태여 윤리와 규범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니 따분한 얘기일 것으로 지레짐작할 것이다. 또한 “초월”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냄새만으로 초월윤리와 최소주의가 실생활과 전혀 동떨어진 얘기라고 속단하기 쉽다. 개인윤리와 사회윤리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비폭력과 자기희생은 참으로 어려운 규범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선생님의 행정철학과 사상에서 주요한 개념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공기와 물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 좀 모호하게 저작 여기저기에 언급되어 있기는 하나 선생님의 행정이론틀을  떠바치는 너럭바위같은 존재가 있다. 바로 참는 것이고 견디는 것이고 기다리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참고 기다리는 것이 선생님의 철학과 사상을 현실적이고 생동감있게 한다고 본다(Park 2015: 293-294). 먼저 선생님께서 장승의 특징을 비폭력으로 설명하신 대목을 옮겨보자.

“문민통치의 전통이 있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 명치유신 때까지도 무인통치를 해 왔던 일본과는 달리 장승은 비폭력 문화의 상징이다. … 장승의 특징은 참는데 있다. 참는다는 것은 포악함에 시달리는 사람이 갖출 덕목의 모두이며 비폭력 문화의 정상을 말한다”(이문영 1980: 383-384).

한국의 장승은 솟대처럼 지역의 경계를 정하며, 평화스럽게 남자(天下大將軍)와 여자(地下女將軍)가 같이 서 있으며, 장군인데도 활이나 칼이나 창을 안들고 있으며, 갑옷이 아니라 혼례식 때 입는 예복을 입고 있으며, 집도 없이 밖에 서서 비바람을 맞으며, 돌이나 쇠나 금이나 은이 아닌 주위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로 만든다(이문영 1980: 383-384). 이러한 장승의 특징은 참는 것인데, 그 재료가 쉽게 사그러지는 나무이기 때문에 장승의 참을성을 돋보인다(이문영 1980: 384). 그래서 장승이 비폭력 문화를 상징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참는 것은 강자의 폭력에 시달리는 약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의 모두라고 했고, 이것이 바로 비폭력이라고 했다(이문영 1980: 384; 이문영 1986: 336). 약자는 참아야 한다는 것이며 참지 않고서 비폭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만큼 참는다는 것이 초월윤리, 특히 비폭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약자의 대응방법은 참는 것

약자가 강자에게 대응하는 방법은 한마디로 인내다(이문영 2001: 348). 참는 것이며 주먹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비폭력이다. 선생님은 노동자(약자)는 죽을 때까지 참아야 한다(이문영 2001: 350)고 말씀하셨다. 약자는 강자의 폭력을 참아내야 할 뿐 아니라 강자의 폭력을 견제하여 약자를 보호할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이문영 1996: 664). 비폭력에서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에 이르는 초월과정을 끈질기게 참아내야 한다(이문영 2001: 349). 이런 맥락에서 초월윤리는 약자의 대응전략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인격이 성숙되고 인간이 완성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이문영 1991: 32).

“부자의 죄를 극복하는 노동자의 대응방법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내(忍耐)하는 것이다. 부자가 하는 짓을 노동자가 참아야 하는 것이 인내해야 할 하나요, 참된 비폭력을 시작으로 해 개인윤리, 사회윤리 그리고 자기희생의 덕목까지도 갖춰나가야 하는 긴 여정의 인내가 바로 인내해야 할 다른 하나이다”(이문영 2001: 348-349).

위의 인용에서 “부자가 하는 짓[폭력]을 노동자가 참아야 하는 것”이 바로 비폭력이다. 아래 인용은 약자가 비폭력으로 대응하기 위해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머리”는 지식과 기술을, “마음”은 누구나 세상에 날 때부터 갖고 나온 “天賦의 마음” (이문영 1991: 44)이다. “天賦의 마음”이 있기에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를 증오하고 저주하기보다는 공존과 평화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는 통치자가 원색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상황하에서도 국민은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 아닌 비폭력으로 대응함이다. 이를 위하여 사람이 일차적으로 사용하는 자산은 머리이며 그 다음이 마음이며 그리고 그 다음은 포악한 것과 포악한 것을 고쳐나갈 것을, 심지어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이를 끈질기게 기다리는 인내이다”(이문영 1986: 335).

요컨대, 참는 것은 이문영의 초월윤리의 기본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참지 않고서는 초월윤리를 실천할 수 없다. 특히 참는 것은 비폭력과 따로 떼어 생각하기 어려우며, 차라리 비폭력 그 자체에 가깝다. 그렇다면 약자는 대체 무엇을 참아야 하는 것일까?

이문영(1996)은 관절염이 낫는 것에 비유하여 (1) 우선 당장 죽을 만큼 아픈 것을 참아야 하고, (2) 그 다음에는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아야 한다고 했다(662, 664). 아픈 것을 참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강자의 권력남용과 포악을 당하여 화가 나고, 분하고, 쓰라린 심정을 견뎌내는 것이다.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욕지거리를 내뱉고,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내던지는 난동(본능적인 감정의 폭발)을 억누르는 일이다.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는다는 것은 아픔을 버텨내는 것이 아니라 솟구치는 욕심을 자제하고 버리는 일이다. 인간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동기가 이해관계인데, 사람들은 그 욕심을 합리성이라는 거죽으로 덮어 부당한 행동을 정당화하곤 한다(이문영 1991: 120). 그러니까 자신이 아닌 타인(공익)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안해도 되는 일도 기꺼이(천부의 마음으로) 해야 한다. 결국 참아야 할 것은 (1) 감정과 폭력(난동)이고, (2) 자신의 이해관계를 끈질기게 놓지 않으려는 욕심이다(표 1).

당장 아픈 것을 참아야 한다

약자는 먼저 강자의 폭정을 견뎌내야 한다. 악한 강자는 권력을 남용하고, 불법 탈법 행위를 저지르고, 물리적 폭력을 동원하여 약자들을 못살게 군다. 힘없는 자들은 “지하로 숨어드는 전철에 흔들리며 그저 내맡긴 몸뚱아리”로 하루하루를 괴롭고 무기력하게 버텨야 한다. 이런 고통스런 사회를 견뎌내야 하는 것이 약자의 몫이다. “그냥 악한 세상이 아니라 구세력이 통치하는 가장 악한 세상”을 참아야 한다 (이문영 1996: 662).

약자는 강자의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고 비폭력으로 대응해야 한다(이문영 1986: 335). 이문영의 비폭력은 주먹질을 하지 않고 말을 하는 것이고, 불필요하게 강자의 감정이나 심리를 자극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고, 꼭 필요한 최소한의 말만을 하는 것이고, 강자조차도 양심에 찔려 차마 거부하지 못할만큼 합당한 말을 하는 것이고, 이성적이고 객관적이인 기준 (법, 절차, 상식, 합의 등)에 준거하여 행동하는 것이다 (Park 2015: 290-291). 악한 정권의 폭력 앞에 굴복하여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순응하거나 무참하게 매를 맞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물리력으로 대들지 말고 당당하게 계속 이치에 맞는 옳은 말만을 하는 것이다(이문영 1991: 118). 이렇게 폭력을 참고 말하는 것이 약자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자 강자를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라 할 수 있다.

“포악한 정권이 쥐고 있는 것은 무기와 폭력이지만, 약한 국민이 갖고 있는 것은 악한 정권에 대하여 정의에 입각한 말함과 저항이기 때문이다. … 오랜 기간 끌었던 포악한 정권들이 무너진 것은 총을 쥔 정권을 향하여 ‘말함’이라는 비폭력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승리였다”(이문영 2001: 88).

그렇기 때문에 약자는 참아야 한다. 악한 강자가 휘두르는 폭력으로 생채기가 나고 피가 나고 죽을 만큼 아프다 해도 그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1) 어쩌면 화가 나고 분하고 증오심이 일고 복수심으로 몸서리치는 것이 당연할는지 모른다. 억눌린 분노를 표출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으로 악다구니를 써서 강자에게 대든다 해도 약자에게 이로울 것이 없다. 증오와 복수에 사로잡힌 난동은 감정을 쏟아낸 잠시의 시원함을 줄 뿐이다. 강자의 폭력 리듬을 맞춰주고 장단을 맞춰주는 어리석은 행위다. 어리석은 난동 뒤에는 더 고통스러운 강자의 폭력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난동이란 승리에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일 뿐이다 (이문영 1986: 297).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는 강자는 약자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판사판으로 대들 것을 예상하고, 또 그것을 은근히 바란다.

권력을 남용하여 약자를 괴롭히는 강자에게 가장 잔인한 복수는 강자가 즐겨하는 폭력 리듬을 깨고 합리성에 박자를 맞추어 옳은 말만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문영의 비폭력이다. 어차피 약자는 힘이 없기 때문에 폭력으로 강자에 맞서서는 승산이 없다(이문영 2001: 148). 비폭력으로 맞서야 약자가 일단 보호가 되고, 그 다음에 약자가 성장을 할 수 있다(이문영 1991: 18-19). 사람에 대한 증오와 저주와 복수를 심중에 담고 매 순간을 사는 일은 또 다른 고통이다. 몸이 건강하다 해도 마음이 괴롭우면 하루하루가 힘겨울 수밖에 없다. 편안하고 행복하기는 커녕 천수를 누리기도 어렵다. 그래서 약자는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고통을 견뎌내야 하고 분노를 참아내야 한다. 그래서 선생님은 “가장 나쁜 세상의 구원을 기다리는 좀 더 밝으며 긍정적인 참음을 우리는 가져야 한다”(이문영 1996: 664)고 적으셨다.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아야 한다

당장 아픈 것을 일단 참은 뒤에는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아야 한다. 강자의 폭력을 견제할 조직이 만들어지는 것을 기다린다. 그래서 “가장 악한 세상에서 가장 시달림을 받을 자가 최소한 보호를 받아 나갈 구조가 생성되는 것”을 참아야 한다고 했다(이문영 1996: 664). 전자가 이문영의 “비폭력”에서 견디는 것이라면, 후자는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에 이르는 과정에서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 비폭력은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의 전제가 된다(이문영 2001: 149). 악한 강자의 포악함은 짧은 시간 내에 고쳐지기 어렵다. 또 아픈 것을 참는 것과는 달리 개인의 이해관계와 욕심을 하나하나 버려나가야 한다. 약속(합의사항)을 지키고, 타인을 돌보고, 자신을 희생하여 타인을 살리는 과정이 이해관계를 초월하고 욕심을 버리는 일이다.

초월윤리를 인사행정에 적용한 예를 살펴 보자(이문영 1996: 563-601; 이문영 2001: 419-431). 먼저 비폭력은 엽관주의(spoils system)를 거부하고 직업공무원제를 정착하는 일이다. 계모가 팥쥐를 편애하고, 쿠데타 정권이 자기 핏줄인 육사출신을 우대하고, 측근들을 낙하산에 태워 산하 기관장으로 내려보내는 일은 이기심과 욕심 때문이다. 개인윤리는 억울한 일이 없도록 경우에 맞게 공정하게 인사관리를 하고 화목하게 지내도록 인간 관계를 향상시키는 일이다. 사회윤리는 그 사람의 능력과 성과 외에 출신지역, 성별, 학력, 재력 등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고용평등주의이며 소외된 국민을 등용시키는 일이다. 자기희생은 공무원들이 단결하여 노동운동을 하는 일을 용납하는 것이다.

개인윤리에서 자기희생에 이르는 길은 결국 자기 몫을 부당하게 챙기려는 이기심을 버리는 일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못된 버르장머리를 고친 후에는 나와 배경이 다른 사람들을 “천부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따돌림시키고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처지를 긍휼하게 된다. 따라서 정당한 내 몫까지도 기꺼이 타인에게 내어주게 된다. 할 수 있어도 스스로 하지 않으니 (정당한 내 몫을 내어주니) 절제라 할 수 있고, 다른 목소리라 하여 내치지 않고 묵묵히 귀기울이니 인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가장 깊은 거기에 있다는 이해관계, 이기심, 욕심을 버리는 것이 참는 것이다. 이것이 병이 나아가는 것을 참는 일이다.

마지막을 잘 참아야 한다

이러한 인내는 마지막까지 끈질기게 이어져야 한다. “심지어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이를 끈질기게 기다리는 인내”를 가져야 한다(이문영 1986: 335). 봄날 새순이 온전히 자라기 위해서는 자연의 순리에 따라서 성장을 해야 한다. 조금 날씨가 풀렸다고 해서 성급하게 고개를 내밀었다가는 여린 새순은 얼어죽기 십상이라고 선생님을 말씀하셨다.  “이 모든 절제가 무기력이 아니라 기다리는 힘이며 성장하는 힘이며 폭력보다 강한 힘이다”(이문영 1991: 19).

특히 마지막 순간에 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크게 될 사람은 (사람이 무엇을 이루려면) 끝을 잘 참아야 한다 (이문영 1991: 198; 이문영 2008: 202). 그래서 “사람은 마지막이 좋아야 한다” (이문영 2001: 219), “말년이 좋으면 청장년시대의 허물을 덮을 수 있다” (이문영 1991: 357)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친일행위를 한 仁村 김성수씨가 말년에 “부산정치파동”에 항의하여 대통령을 탄핵하고  부통령을 사직하고 민주당의 씨앗을 뿌린 것을 높이 평가하셨다(이문영 1991: 357). 또한 밥을 짓는데 마지막 1-2분을 못참으면 설익어서 못먹는다고 하셨다 (이문영 1991: 198; 이문영 2008: 202).

“참는 자는 마지막을 잘 참아야 한다. 평화를 위한 조짐이 더 많이 보일수록 철저하게 같은 길을 가야 한다” (이문영 1986: 298).

왜 하필 마지막이 중요할까? 아마도 가장 방심하기 쉬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 찰라의 방심이 오랜 시간 견디고 기다려온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위한 조짐”이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처럼 당장이라도 군부독재가 끝장나고 민주주의가 시작될 것같은 분위기를 말한다. 정권이 위기에 몰려 덜 무서울 때여서 기회주의자들이 인기에 편승한 발언을 쏟아내고 대중의 요구가 과다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밥솥에서 김이 나오고 구수한 밥냄새가 풍겨올 때 마치 밥이 다 된 것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그 순간 뜸들이는 것을 잊고 뚜껑을 열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이럴 때일수록 끈질기게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밥이 다 될 때까지 꾹 참고 있어야 한다. 피부병도 한참 나아갈 때보다 나아가는 마지막 고비가 더 힘들다. 가려움과 아픔과 성적 쾌감이 교차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 마지막 순간을 참지 못하고 상처를 건드리거나 긁으면 그동안 힘겹게 견뎌온 시간이 허사가 된다. 결국 마지막 순간의 방심을 경계해야 하며 끝까지 합리성에 근거한 초월윤리의 길을 가야 한다는 뜻이다.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가?

약자가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러하다. 끈질기게 강자의 폭력을 참아내고 욕심을 버리면서 비폭력에서 자기희생에 이르는 초월윤리에 귀의한다면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1) 폭력을 기반으로 한 정권은 강하게 보이지만 실은 정당성이 없어서 법을 무시하고 폭력에 의지해야 할만큼 허약하고, (2) 나중에는 악법을 새롭게 만들어 정권유지를 도모하지만 그 악법마저도 지키지 않게 되고, (3) 이런 최악의 상황에 이르면 못난 정권은 스스로 망하기 때문이다(이문영 1986: 289, 297, 340; 이문영 2008: 346-347). 시민들의 비폭력 투쟁으로 악한 정권은 스스로 붕괴된다. 그런데도 시민들이 폭력 투쟁을 하면, (1) 거의 넘어가던 정권이 정당성을 회복하는 빌미를 주게 되고 (2) 더 강경한 폭력 정권이 출현할 유인을 제공하며, (3) 설령 폭력 정권이 무너져도 새 질서를 만들지 못하게 된다(이문영 1986: 297-298). 그래서 “포악한 자는 스스로 망하지만 악한 자가 망한 후의 [사회]는 비폭력의 실력자만이 구축한다” (이문영 1986: 289).

그러나,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가 쉽지 않다

악한 강자가 약자를 파괴하고 급기야는 자신까지 파괴하는 비극보다는 약자가 비폭력으로 대응하여 강자의 악한 통치를 견제하여 피아 모두를 살려내는 희극이 이루어내기가 훨씬 더 어렵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이문영 2001: 203-204). “약자는 악한 통치를 그때그때 견제하기가 힘들고 시간도 오랜 세월을 끈질기게 참아야 한다” (이문영 2001: 204).

하지만 마지막까지 참고 견디고 기다리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먼저 시민들이 성숙한 인격과 의식을 가져야 하고, 강자의 폭력(보복)이라는 위험을 감수할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Park 2015: 294). 또한 강자의 폭력에 휘둘린 약자는 차분히 합리성을 생각할 여유를 갖기 어렵다. “긴긴 터널 길을 실려가는 희망없는 짐짝들”은 하루하루 가뿐 숨을 몰아쉬며 날이 서 있어서 폭발 직전이다. 강자의 갑질과 아등바등하는 일상에 지쳐서 이미 참을 만큼 참은 상황이다. “헬조선”, “묻지마”,  “홧김에” 등이 약자들의 인내가 바닥임을 말해준다. 악한 강자가 아니라 이웃을 비난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자가 가야 할 길이 끈질기게 참고 버티는 것이니 어찌하랴. 분노를 억누르고 비폭력에 의지하고, 욕심을 버리고 초월윤리로 귀의하는 수밖에. 이를 악물고 서로 격려하고 허물을 감싸주면서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나갈 수밖에…

각주
1) 물론 약자의 생명이 위협을 받는 위급한 상황이라면 일단 그 자리를 피하고 보는 것이 상책이다. 다가오는 폭력을 회피하는 방법이다(이문영 1980: 366). 가만히 앉아서 칼맞고 총맞는 것이 비폭력이 아니다.

참고문헌
Park, Hun Myoung. 2015. Moon-Young Lee’s Transcendence Ethics for Democratic Public Administration. World Environment and Island Studies 5(4): 283-296.

원문: 박헌명. 2016. 비폭력은 참고 견디고 기다리는 것이다. <최소주의 행정학> 1권 9호(2016년 9월): 1-3쪽

기본

성주군민의 죄와 국무총리의 ‘매값’

지난 7월 15일 국무총리 황교안씨가 경북 성주군을 방문하였다. 미국의 미사일요격체계라는 THAAD기지를 그 지역에 배치하게 된 연유를 설명하다가 여섯 시간 동안 군민들에게 곤혹을 당하였다. 일부 성난 군민들은 황씨에게 고함을 지르고, 소금을 뿌리고, 물병과 달걀을 던졌다고 한다.

방송과 신문에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손나발을 불어댄다. 감히 국무총리에게 패악질을 했다느니, 불법 폭력시위를 했다느니, 공무집행방해와 교통방해를 저질렀다느니, 감금죄를 물어야 한다느니, 불순한 외부세력이 개입했다느니, 종북좌파가 어쩌느니 연일 떠들어 댄다. 왜 미군기지를 성주에 설치해야 하는지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정승에게 달걀을 던진 불경스런 백성을 어떻게 단죄할 것인가를 앞다투어 따지고 있다. ‘사고’를 치고 외국으로 나간 박근혜씨를 대신해서 황씨가 총대를 메고 귀중한 ‘매값’을 벌어온 셈이다. 과연 성주군민들은 이런 돌팔매질을 당해 마땅한가?

왕과 정승의 ‘매값’

백성들이 왕이나 정승에게 폭언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일은 드물다. 불경죄로 볼기가 너널거리도록 곤장을 맞거나 아예 역적으로 몰려 능지처참을 당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에게 욕지거리를 하고 장돌을 던진다면 백성들이 벼랑 끝에 몰렸다는 뜻이다. 일상의 문제해결절차와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백성들은 공포와 분노와 흥분으로 몸서리치고 있다는 소리다. 몇가지 사례를 더듬어보자.

2015년 4월 16일 전남 진도에 있는 세월호 참사대책본부를 찾은 국무총리 정홍원씨는 분노한 실종자 식구들에게 물 세례를 받았다. 이명박 정권에서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했던 국무총리 정운찬씨가 2009년 11월 28일 세종시(충남 연기)에서, 12월 12일 대전 KBS에서 달걀 세례를 받았다. 1999년 6월 3일에는 일본을 방문하려던 김영삼씨가 김포공항에서 박의정씨에게 빨간 페인트가 들어있는 달걀을 맞았다. 외환위기를 초래하여 나라를 망쳤다는 이유에서다. 국무총리로 지명된 정원식씨는 1991년 6월 3일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마지막 강의를 강행하다가 밀가루와 달걀을 덮어쓰고 학생들에게 발길질을 당하였다. 문교부장관 시절 전교조 교사들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굴비엮듯이 줄줄이 끌어갔고 1,500여명을 교단에서 내쫓은 업을 쌓았기 때문이다.

달걀 세례를 가장 많이 받은 왕은 노무현씨다. 김영삼씨의 삼당합당에 반대한 후 1990년 부산역에서 열린 시민대회에서, 2001년 5월 22일 방문한 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서, 2002년 11월 13일 여의도에서 열린 “우리 쌀 지키기 전국농민대회”에서 봉변을 당했다. 서초동 대검찰청으로 소환된 2009년 4월 30일에는 타고 있던 버스에 달걀이 날아들었다. 이회창씨(2007년 11월 13일 대구)와 이명박씨 (2007년 12월 3일 의정부)도 달걀을 맞기도 했지만 미미한 수준이었다. 한편 한강인도교를 폭파하고 대구로 도망간 이승만씨와 왜놈들에게 쫓겨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달아난 선조 이연씨는 무슨 욕지거리를 들었을까?

정원식씨는 학생들의 움직임을 알고서도 평소처럼 강의를 나갔다. 무방비 상태에서 난타당하는 국무총리의 처참한 모습을 내외언론에 생생하게 전했으니 ‘매값’을 두둑히 받아낸 셈이다. 대학생 20여명이 잡혀가서 실형을 받았고, 이 사건을 빌미로 노태우 정권은 공안정국을 공고화했다. 김영삼씨에게 닭알을 투척한 박씨는 집행유예를 받았다. 정홍원씨나 정운찬씨는 사태가 하도 험악해서 처벌하자는 말도 꺼내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반하여 노무현씨는 “정치인들이 한번씩 맞아줘야 국민들 화가 좀 안 풀리겠냐. 계란을 맞고 나면 문제가 잘 풀렸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2011년 11월 필리핀에서 군사협정에 반대하는 시민들로부터 달걀을 맞은 클린턴 부인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매값’을 구걸하는 자와 주권자의 매질을 달게 받는 자가 이렇게 다르다.

성주군민의 죄

그러면 성주군민들이 지은 죄는 무엇일까? 먼저 그들은 약자이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듯 자기 동네에 미군기지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사람들이다. 한마디 언질도 없이 덜컥 미군기지 배치를 결정한 정권은 강자다. 약자를 우습게 여기고 힘으로 찍어 누르는 우악스러운 통치자이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강자다.

성주를 방문한 황교안씨에게 군민들이 반대의사를 표시하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내뱉고, 길을 가로막고, 물병을 던지고, 소금을 뿌리고, 달걀을 던진 것은 분명 지나쳤다. 타인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한 행동임이 분명하고 물리력을 동원하여 황씨의 생명을 위협한 것은 아니지만, 성숙되지 않은 군중의 부적절한 행동이었다.

이문영은 “비폭력이란 통치자에게 폭력을 당하더라도 약자는 폭력을 쓰지 말라는 것” (2008: 68-69)이라고 밝히고, “돌만 던지지 말라. 그리고 안할 것은 세상없이 무서워도 안해라” (1986: 292) “일단 어떠한 경우에도—그러니까 돌을 던지도록 유도된 상황하에서도—학생들이 돌을 던져서는 안된다” (1986: 291)고 역설했다. 유감스럽게도 성주군민들은 권위주의 정권의 속임수(“제발 뺨이라도 갈겨줍쇼. 아님 욕이라도 해줍쇼.”)에 말려든 것이다.

“피치자만이 지키라는 법이 아니고 통치자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법이다. 법을 통치자가 지키지 않을 때 아무도 규칙의 존재를 믿지 않게 되고 혼란이 생기며, 이 혼란은 제일 바람직하지 않는 사회현상이다. 피치자인 국민에게 주는 신호는 비록 정부가 폭력을 행사하더라도 이에 말려들지 말고 비폭력의 길을 가야 한다는 신호이다” (1986: 289).

그리고 폭력은 물리력은 물론 언어, 심리, 감정 등을 동원한 폭력 모두를 의미한다. 교묘한 말을 하여 감정을 흐트리거나, 힐난을 하는 것은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폭력에 가깝다. 이문영은 다음과 같이 ‘말폭력’과 비폭력을 구분하였다. 그러니까 성주군민 일부가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내뱉은 것은 비폭력이 아니라 말폭력이다.
“상황 1에서 예수의 비폭력 저항—비폭력이라는 이름 아래 행하여지는 폭력이나 폭군의 웃는 얼굴과는 거리가 먼 저항—을 본다. … 비폭력이란 저쪽에서 때리더라도 이쪽에서는 말로만 대응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의 행사가 아님을 상황은 보여준다. 따라서 폭력의 반대어는 말을 계속하는 일이다” (2001: 246).

성주군민들의 죄는 노여움을 미처 삭이지 못하고 잠시나마 이성이 아닌 감정에 의지한 것이다. 물론 일부 군민들이 저지른 실수이다. 고성과 욕설을 보내기보다는 항의서든 요구서든 최소한의 주장을 담은 글을 전달하거나 낭독했어야 했다. 물병을 던지고 소금을 뿌리고 달걀을 던지기보다는 입가리개를 하고 침묵시위를 했어야 했다. 설명회에서 나선 황씨를 멀리 등지고 (황씨 앞에 청중이 없도록) 조용히 연좌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성숙한 민주시민이 되지 못하고 그저 본 대로 들은 대로 느낀 대로 행동하는 순수한 백성들이었던 죄다. 약아빠지지 못한 순진무구純眞無垢가 죄라면 죄다. 그래서 음흉한 정권이 의도한 대로 꼬투리를 잡혀 연일 신문 방송에서 무방비로 두들겨 맞고 있다. ‘매값’을 비싸게 물어주고 있다. 하지만 성주군민들의 죄를 묻는 것은 법으로 보나 윤리로 보나 지나치다.

합리성적 저항과 완전한 비폭력

이문영은 모든 나쁜 것은 관官에서 나오고 모든 좋은 것은 민民 에서 나왔다고 전제했다 (1991: 42). “가라지의 악이[든] 곡식의 악이[든] 악의 근원은 정부의 과격이다” (2008: 589).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 이 말은 원래 官은 좋은 행동을 할 능력을 안 가졌다는 것이기도 하다” (1991: 29).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고 통치자와 官은 국민의 종이기 때문이다(主權在民). 주인은 이런 머슴의 버르장머리를 바로잡아야 하는데, 그 방법은 “合理性的 抵抗”이며 비폭력 투쟁이다 (1991: 30), 왜 그러한가? 폭력에 의지하는 통치자는 자기가 정한 법도 안지킬만큼 제멋대로여서 비폭력 투쟁으로 붕괴가 된다 (1986: 297). 그런데 백성들이 폭력 투쟁으로 대응하면 자체분열을 하던 못된 머슴들이 단결하여 폭력 정권을 공고히 하게 된다 (1986: 197). 결국 머슴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려면 주인이 끝까지 수모를 참고 견디면서 비폭력 투쟁을 이어나가야 한다.

이문영은 “(백성이) 즐거움을 못얻었다고 해서 그의 上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며, 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백성과 동락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亦非也)”라는『孔孟』「梁惠王」下 4장을 종종 인용했다 (1996: 74, 293, 606). 上의 폭력과 마찬가지로 下의 난동도 용납될 수 없다. “나는 이러한 안하무인의 꼴을 관(官)과 민(民)에서 각각 보기 싫다… 안하무인의 관을 정치학에서 말하길「벌거벗은 힘」이라고 한다. … 벌거벗은 힘의 행사를 민이 하는 것도 역겨움을 준다” (1986: 81)고 말했다. 이문영은 민의를 수렴하지 못하는 과격한 정부와 부패하고 분열하는 과격한 국민이 한덩어리가 되어 과격함이 극에 달하는 것을 경계했다 (2008: 578).

“…평화적이라는 말은 쿠데타라든지 국민측에서 발생하는 난동이 없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난동이란 4·19와 같은 저항권의 행사라든가 만주에서의 독립군 활동과 같은 정쟁(政爭)을 뜻하지 않는다. 난동이란 승리에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를 말한다. 난동은 따라서 참여의 폭이 좁든가 승리를 향한 전략 전술면에서의 계산이 부족한 행동이다” (1986: 297).

약자가 강자에게 대응하는 방법(대안)은 한마디로 비폭력이다 (1986: 294). 약자는 어차피 폭력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폭력으로 강자에게 맞서서는 승산이 없다. 비폭력은 감정이 아닌 합리성이다. 철저하게 이성에 근거한 행동으로 ‘폭력 대 폭력’ 구도에서 ‘자의성 대 합리성’ 혹은 ‘야만 대 문명’으로 국면을 바꿔야 한다. 모든 면에서 불리한 약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끈질기게 참고 기다려야 한다. 감정에서 벗어나 이성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매사를 조심해야 한다. 힘센 통치자의 이성조차 감히 거절하지 못할만큼 합당한 말만을 조심스레 해야 한다 (2008: 66, 80). 그냥 비폭력이 아니라 철저하게 합리적인, 완전한 비폭력이어야 한다.

“… 악한 통치자의 악은 피치자 …의 성숙하고 완전한 제재에 의하여 견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강자인 통치자를 섣불리 건드려 강경책을 강화하게 하는 미숙하고 불완전한 대응책보다는 강자가 꼼짝없이 악을 계속 저지를 수 없게 하는 대응책을 찾는 것이 약자에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8: 59).

일부 성주군민들이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퍼부은 것은 물리적 폭력은 아니라 해도 완전한 비폭력이라 할 수 없다. 약자의 노여움과 억울함을 분출시킨 것이다. 쓸데없는 말이고 지나친 언동이다. 완전하지 않은 어설픈 비폭력이며, 합리성과 거리가 먼 ‘말폭력’일 뿐이다. 강자에게 꼬투리를 잡혀 더 잔인한 폭력을 부를 뿐이다. 죄송하다면서도 속으로는 제발 뺨이라도 한대 갈겨달라며 꼬드기는 양아치들 아니던가. 다행히 성주군민들이 그 음흉한 계책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지금은 최소한의 행동으로 맞서고 있다.

박근혜 정권이 훨씬 더 나쁘다

성주군민들이 황교안씨에게 고성을 지르고 달걀을 던진 것은 잘못한 일이다. 일부 군민들의 일탈 행위라 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폭력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은 훨씬 더 잘못했다. 공론없이 통치자의 결정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짓을 반복하고 있다. 군민들은 절차적 합리성을 묻고 있는데, 국가안보를 위한 고육지책이라며 볼멘 소리를 하고 있다. 사오정식 딴소리다. 이제는 뒤늦게 대화를 한답시고 군민들이 아닌 지역 정치인과 유지들을 찾고 있다. 동시에 성주군민들의 폭력행위를 처벌하는데 골몰해 있다.

하지만 핵심은 성주군민의 난동이 아니라 권위주의 통치자의 폭력이다. 애초에 잘못을 저지른 자들은 성주군민이 아니라 외부세력이다. 혈맹이랍시고 미국을 끌어들여 조용한 마을을 시끄럽게 만든 정권의 종미주의자들이다. 군민들을 자극하여 폭력을 유도해 놓고 처벌을 한다면서 설치고 다니는 불순세력이다. 선량한 군민들을 폭도로 몰아세우고 있는 전문시위진압꾼들이다. 백성과 동락하기는 커녕 힘으로 누르고 발길질을 해대는 못난 上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보를 들먹이며 자기 잘못을 백성의 책임으로 떠넘기고 있다. 도둑이 주인을 매질하고 방귀뀐 놈이 성내는 격이다.

안타까운 것은 음흉한 정권은 약자의 행동 원리를 훤히 꿰고 있는 반면에 정작 순진무구들은 그 얼개를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약자인 백성들이 나쁜 통치자의 손에서 놀아나고 있다. 강자가 폭력을 휘두르는 무서운 상황에서 약자들은 신중한 최소주의 행동을 해야 하는데, (1) 비폭력, (2) 동지들과의 합의, (3) 일반 시민의 호응과 연대 모색이 포함된다 (1991: 25-26).

음흉한 정권은 (1) 멋대로 결정해놓고 자신감있게 폭력을 행사한다. 백성을 궁지에 내몰고 자해공갈에 가까운 방법으로 약자의 난동을 유발하여 ‘폭력 대 폭력’ 구도를 만든다. (2) 반대하는 사람들의 약점을 잡아 분열시키고 낙하산으로 장악한 신문 방송을 동원하여 여론을 몰아간다. 반대의견은 유언비어로 폄하하고 찬성의견을 부추겨 이간질한다. 뒷조사를 하고 처벌을 운운하면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다. (3) 벼랑에 내몰린 백성들을 ‘왕따’시킨다. 시민사회가 관심을 갖지 못하도록 윽박지른다. 시민연대를 차단한다. 1980년 광주처럼 철저하게 고립시킨 뒤 맘놓고 ‘왕따들’를 난타질한다. 외부세력=불순세력=종북좌파=빨갱이를 들먹거리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약자의 비폭력 투쟁을 분쇄하기 위함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약자들이 비폭력을 실행에 옮기기란 쉽지 않다. 완전한 비폭력은 감정이 아닌 이성에 의지하여 오랜 세월을 끈질기게 참고 견디어야 하는 인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비폭력의 얼개와 의미를 깨달아야 하고, 감정과 유혹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 다른 사람들을 긍휼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소주의 행정학> 제1권 7호. 2016. 7.

기본

이문영의 비폭력과 현실적 이상주의

흔히 사람들은 이문영 선생님을 이상주의자라고 곡해한다. 선생님의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행동에는 동의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선생님께서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고집스레 추구해서 쓸데없는 분란을 만들고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는 뜻이다. 또한 운동권 학생들과 그 태도와 주장이 같은, 혹은 그들을 배후조종하는 “운동권 교수”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현실과 거리가 먼 이상을 추구하는 맹목적인 열정이 같다는 뜻일 게다. 이러한 곡해는 선생님의 행정 철학과 사상을  이해하거나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에서 비롯되지만, 직접 원인이 된 것은 쿠데타 정권의 낙인찍기가 아닐까 생각한다.

못된 정권은 폭력을 동원하거나 언론사를 사주하여 멀쩡한 (평범한) 사람을 아주 특별한 사람으로 낙인찍곤 한다. 조기숙(2012)은 이런 것을 왕따현상이라고 불렀다. 선생님에 대한 낙인은 (학자가 아니라) 민주투사,  진보주의자, 이상주의자, 영웅심리로 괴팍한 짓을 골라서 하는 괴짜 등이며, 심지어는 급진 좌파와 공산주의자(빨갱이 교수)를 포함한다 (Park 2015: 285). 이러한 낙인찍기와 왕따질은 선생님을 일반인들로부터 떨어뜨려 놓아 사람들이 선생님의 진면목을 살펴 볼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고, 그들이 만들어낸 허상만을 진짜인 것처럼 믿도록 했다. 많은 사람들은 선생님이 정말 진보주의자인지, 괴짜인지, 공산주의자인지 스스로 판단하기보다는 그저 그런 것으로 인식하도록 학습되었다. 선생님께서 스스로를 자본주의자, 중도우파, 명예혁명가, 한국청교도,  최소주의자, 유물론을 배격하는 유신론자로 평한 것과는 전혀 딴판이다.  자본주의의 핵심에 해당하는 회계와 재무를 공부하고 평생 예수를 섬겨 한 교회만을 꾸준하게 다니신 분이 어찌 공산주의자가 되고 빨갱이가 된단 말인가. 정권의 상징조작에 말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원치않는 왕따질(강화자와 방관자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선생님에 관한 가장 흔한 곡해는 이상주의자인 것같다. 진보주의자, 공산주의자, 빨갱이 등은 전혀 터무니없다. 선생님은 과연 무지개를 쫓아 헤매던 소년처럼 세상 물정 모르고 이상에만 몰두하였을까? 나는 선생님의 비폭력과 최소주의를 정말 고통스럽게 이해하였다. 나름대로 소화하고 그 참뜻을 깨닫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선생님의 비폭력과 최소주의는 선생님이 이상주의자가 아닌 “현실적 이상주의자”임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선생님의 행정 철학과 사상의 고갱이를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한다.

학생증 검사를 참아야만 합니까?

1991년 봄학기에 나는 선생님의 <행정철학> 강의를 들었다. 고대 대학원 도서관 건물에 있는 낡은 강의실에서였다. 선생님의 <자전적 행정학> 원고를 중심으로 비폭력, 개인윤리, 사회윤리, 자기희생을 토론하고, 그 초월윤리를 조직, 인사, 정책, 재무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따졌다.

선생님의 강의가 있던 어느 날 나는 법대 후문으로 들어오면서 학생증 검사를 받아야 했다. 마침 그 날 대운동장에서 대규모 집회가 예정되어 있었는데, 경찰이 외부인 출입을 차단하기 위하여 고대 학생증을 요구했다. 그 당시 경찰은 집회가 있을 때마다 종종 입구에서 학생증을 검사했고, 가끔씩 외부인을 적발하여 체포하기도 했다. 경찰관직무집행법의 불심검문 조항에 근거를 두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모든 출입자를 “어떠한 죄를 범하였거나 범하려 하고 있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보아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도 않고 학생증을 보여달라고 요구한다는 것은 부당한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남의 집 앞을 가로막고 서서 자신이 주인인지를 확인하겠다고 하는 식이니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나는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비폭력을 정확히 이해하는데 힘들어 했다. 비폭력이 주먹이 아닌 말로 하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왜 비폭력이 “이래야 약자가 일단 보호”가 되고 “이제는 약자가 성장”을 하는지 (1991: 18-19) 마음으로 납득하지 못했다. 혼란스러웠다. “이 모든 절제[비폭력]가 무기력이 아니라 기다리는 힘이며 성장하는 힘이며 폭력보다 강한 힘이다” (1991: 19)라고 말씀하셨지만 뜬 구름을 잡은 것처럼 공허했다. 답답한 마음이었고,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우둔함을 탓할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의 학생증 요구는 울고 싶어하는 아이의 뺨을 때리는 격이었다. 강의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나는 여느 때와는 달리 행동하기로 했다. 일이 어찌 될 것인지 알고 싶어했다.

무장을 한 채 후문을 막아선 전투경찰이 학생증을 요구할 때 나는 당신들이 무슨 권능으로 이런 짓을 하는지 물었다. 내 학교를 들어가는데 왜 경찰의 확인을 받고 가야 하는가를 물었다. 학생증을 보여줄 것을 요구했던 그 경찰은 처음에는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질문이 이어지면서 짜증으로 바뀌었다. 심각해진다. 얼마 안있어 상급자로 보이는 (무장을 안한) 경찰이 와서 내게 한마디를 툭 던진다. 학생증을 안보여주면 연행을 해서 신분조회를 한댄다. 그 음흉한 속내가 훤히 보인다. 가관이다.

폭력이란 것이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법이 어찌 되어 있는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이다. 오직 “쪽수”가 많고 적은지, 물리력으로 이길 수 있는가, 얼마나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가를 묻는 상황이다. 경찰은 “쪽수”와 물리력에 자신이 있었고, 서로에게 피해가 덜 되는 쪽으로 선택상황을 몰고 갔다. 학생 대부분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나의 반항은 그 시작은 장대했으나 그 끝은 비참했다. 강의는 이미 시작이 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학생증을 보여주고 뛰어와야 했다. 화가 치밀었다. 법과 전혀 상관없이 돌아가는 현실(벌거벗은 권력)에 화가 났고, 어떤 대안도 없이 속수무책인 것이 화가 났다.

강의실에 들어서서 땀을 훔치면서도 나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미처 감정을 누그러뜨리지 못한 채 선생님께 여쭈었다. 법대 후문에서 경찰이 학생증 검사를 하고 있었는데, 이런 부당함을 알고도 순순히 학생증을 보여줘야 하는가를 여쭈었다. 선생님의 비폭력이 어떻게 이 상황에서 약자를 보호하고, 나아가 약자를 성장시키는지 알 수가 없다고 투정을 부렸다. 철모르는 학생은 흥분해서 질문을 했는데, 선생님은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답을 하셨다. 선생님의 답은 허망하리만치 간단하고 쉬웠다.

선생님은 고대생이 학생증을 순순히 보여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학생증 검사가 부당하지 않느냐며 따지듯 여쭈었다. 선생님은 짧게 부당하다고 답하셨다. 그러면 말로 따진 것이 잘못이었느냐고 반문했다.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내가 말로 따졌다기보다는 흥분해서 항의를 한 것을 아셨던 것 같다. 잘잘못을 구분하시기보다는 학생증을 보여주고 오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반복하셨다. 나중에 선생님 말씀을 차분히 생각해 보니 이런 논리였다. 경찰에게 대들면 더 큰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말로 따진다지만 그 상황에서 따지는 것은 사실상 폭력에 가깝다. 경찰도 자기들이 하는 짓이 정당하지 않은 것을 알기 때문에 항의를 하면 오히려 그들이 자극을 받아 또 다른 폭력을 동원할 것이다. 약자가 강자의 아픈 곳을 계속 찌르거나 약점을 물고 늘어지면 어찌 강자가 가만히 있겠는가. 어차피 정당성이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으니 무슨 짓인들 못할 것인가. 하물며 교수도 아닌 학생이 감정을 노골로 실어 따지고 들 경우임에랴… 전투경찰 상급자가 연행을 한다느니 하는 것이 바로 그 폭력이요 보복인 것이다.

너무나 차분하고 간단한 답변에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할 말을 잃고 있는 내게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하셨다. 쓸데없이 경찰을 자극하여 긴장을 조성하는 것은 집회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하셨다. 예컨대, 고대생이 사사건건 따지고 들면 경찰이 더 열심히 학생증을 검사할 것이고 경찰 인원도 늘렬 것이다. 그러면 외부인이 학교 안으로 진입하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반대로 순순히 학생증을 보여주면 경찰은 대충대충 검사를 할 것이고 (정당하지 않은 일을 위에서 시키니깐 마지못해 그냥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외부인이 학교 안으로 들어오기가 더 쉬워질 것이라고 하셨다. 특별히 좀 바보같은 표정으로 학생증을 고분고분 보여주면 경찰이 “고대생 놈들이 생각보다 형편없군”하면서 검사를 설렁설렁 할 것이라고 빙그레 웃으며 덧붙이셨다.

비폭력은 성숙하고 완전한 대응책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듯한 선생님의 답변에 씩씩거리며 대든 나는 마지막 주먹을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분기탱천하여 선생님께 항의를 하듯 질문을 해놓고 바로 한방에 나가떨어진 셈이다. 나는 속으로 처절한 외마디를 내질렀다. “이것이었나…” 선생님은 “악한 통치자의 악은 피치자 …의 성숙하고 완전한 제재에 의하여 견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강자인 통치자를 섣불리 건드려 강경책을 강화하게 하는 미숙하고 불완전한 대응책보다는 강자가 꼼짝없이 악을 계속 저지를 수 없게 하는 대응책을 찾는 것이 약자에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8: 59)고 적으셨다. “철저하고 엄격한 현실이해”를 강조했고 “현실인식”이 없는 이상추구는 패배주의를 만든다고 하셨다 (1986: 298).

감정이 실린 말로 따진 것은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비폭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말폭력”이었고 사실상 난동에 가까왔다. “난동이란 승리에의 접근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강경화에 구실을 주는 단순하고 감정발산적인 폭력행위를 말한다. 난동은 따라서 참여의 폭이 좁든가 승리를 향한 전략 전술면에서의 계산이 부족한 행동이다” (1986: 297). “비폭력이란 철저하게 비폭력이어야 함” (2001: 149)을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현실에서 힘이 없는 자가 “미숙하고 불완전한 대응책”으로 강자에게 대항했다가는 더 센 폭력으로 보복을 당한다는 것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현실을 철저하고 엄격하게 이해하지 못한 풋내기 최소주의자의 난동은 이처럼 어이없고 참담한 패배를 자초했다. 한마디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몰랐던 것이다. 선생님은 내가 완전한 비폭력이 아닌 어설픈 비폭력으로 경찰의 비위를 건드려 낭패를 본 것을 오래 단련된 “감”으로 알고 계셨던 것이다. 나는 이래서 참는 것이, 그리고 철저하고 완전한 비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이 강자의 폭력으로부터 약자를 보호하는 것임을 절절히 느꼈다.

실용주의자의 현실적 이상주의

선생님의 비폭력은 이상이 아닌 현실에 근거한 실용주의였다.  일반 백성들이 겉멋이 아닌 실속을 챙기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과연 보수주의자이며, 최소주의자이며, 청교도인 선생님의 모습이다 (2008: 150, 264, 500).

선생님은 이상(이념)과 함께 현실(실현가능성)을 따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약자의 입장에서 볼 때에 대안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비폭력을 말한다. 비폭력이란 아무일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적어도 두 가지 일을 하면서 비폭력의 길을 간다. … 하나는 실현가능성을 확보하는 일을 한다. 둘은 올바른 이념[이상]에 헌신을 한다” (1986: 294). 선생님은 또 “운동은 이상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며 이상이 자리잡을 현실을 고려하는 것이다. 그냥 이상주의가 아니라 현실적 이상주의 같은 것이 운동의 대정신인지도 모른다” (1986: 138) “여호와의 신은 이상주의자이라기보다는 현실적 이상주의자이어서 야곱이 최소한도로 불가피한 상황에서 회개하는 것을 뜻있게 본다” (1980: 370)라고 적었다. 선생님은 스스로 여호와처럼 현실적 이상주의를 지향하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완상의 햇볕정책을 민주화라는 원칙(이상)에 선통일 요구라는 현실을 흡수한 현실적 이상주의라고 해석했다 (2008: 438).

중요한 것은 현실인식이 단순히 자신의 이익과 손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추구하는 이상에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님 말씀처럼 이상이 자리잡을 현실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는 뜻이다. 학생이 자신의 학교를 드나드는 것은 개인의 일이라면, 대중집회를 예정대로 여는 것은 이상에 가까운 일이다. 나는 개인의 일에 관한 현실이 아닌 이상에 관한 현실을 철저하게 인식했어야 했다.

선생님은 불가능한 일을 대의와 명분만을 앞세워 추구하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치열하게 현실을 계산하고 분석하는 분이셨다. 예컨대, 정년을 하면서 얼마를 손에 쥐고 있어야 말년을 걱정없이 보내는지부터 언제 어디서 누가 성명서를 발표하는지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현실을 인식하셨다. 아직도 선생님을 이상주의자라고 폄하하는 분이 있다면 위에 적은 일화를 들려주고 싶다. 선생님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적 이상주의에 충실한 보수주의자요 실용주의자라고 말해주고 싶다.

참고문헌

조기숙. 2012. 안철수 캠프, ‘노무현 왕따’ 현상 이해해야. 오마이뉴스. 2012. 9. 2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81941
Park, Hun Myoung. 2015. Moon-Young Lee’s Transcendence Ethics for Democratic Public Administration: Meanings and Rationales of Lee’s Nonviolence. World Environment and Island Studies 5(4): 283-296.

기본

“나에게 고맙게 한 이를 잊고 싶지 않다”

나는 이문영 선생님의 마지막 학부 지도학생이다. 1987년 봄 고대 행정학과에 입학했을 때 동기생이 65여명 되었는데, 가나다 순으로 학번을 매겼다. 절반을 나눠서 앞쪽에 있는 동기생들이 정년을 앞둔 선생님께 지도를 받도록 배정되었다. 그 앞쪽 절반의 거의 끝에 내 이름이 있었으니 마지막 지도학생이라 해도 과한 말은 아니다. 물론 모든 학생들이 지도교수와 “고대스러운” 사제관계를 맺은 것은 아니다. 많은 동기생들이 지도교수가 누군지도 모르거나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선생님 화갑기념 논문집 출간회에 가서 심부름을 하고, 동기생과 북한산 등산을 마치고 쌍문동 선생님 댁을 불쑥 방문하고, 현민 유진오 선생 빈소사건에 사용된 피켓을 만드는 일을 거들고, 다른 대학의 행정고시반 운영현황을 조사하여 선생님께 보고하고, <자전적 행정학> 원고를 타이핑해드린 것은 특별한 우연이자 행운이었을 것이다.

나는 나름대로 감성이 풍부한 촌티나는 학생이었다.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많으나 제대로 표현할 줄을 몰랐다. 중고등학교 시절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지냈기 때문에 생각한 것을 말로 제대로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더욱 힘들어 했다. 하려는 말과 입으로 나온 말이 달라 종종 당혹스러워 했다. 생각은 많아서 터질 듯 쌓여만 가는데 마땅히 배설할 방법을 알지 못해 끙끙거렸다. 교과서에 있는 민주주의와 최루탄에 여기저기 흩어지는 현실은 너무나 멀어 보였다.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서로 맞지 않았다. 이러한 괴리에 화가 나고 그것을 소화해내지 못하는 나 자신에 화가 났다. 시한폭탄처럼 위태위태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지독한 혼돈과 분노와 좌절 속에서 전두환의 4.13호헌조치, 고대 교수들의 4.22 호헌 반대성명, 6.10 민주항쟁, 6.29선언이 이어졌다

나는 선생님의 <재무행정>을 수강하면서 무언가 깨닫는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복식부기라는 돈셈 원리에서, 처음 30만원 목돈을 만들기가 더 어렵다는 대목에서, 처음에 들어온 30만원짜리 사람을 들볶아 대면 나중에 30원짜리도 안되는 폐인이 되어 나간다는 말씀에서(이문영 1991:198) 나는 실마리같은 것을 얻게 되었다. 물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전체가 아닌 몇몇 파편을 주워듣고 기뻐했을 뿐이다. 사실 선생님 말씀은 대개가 어려웠다. 나름의 맥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뜬구름같은 얘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말씀하시는 것을 잘 듣고 다만 몇 마디라도 이해하려 애썼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까? 여러 번 곱씹어 생각했고, 가끔씩 늦게나마 그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똑똑한 학생이 아니었음에 틀림이 없다. 생각한 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조차도 버거워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꾸준함”이 귀하다 말씀해주시고,『論語』의 學而篇에 나오는 “巧言令色 鮮矣仁”을 설명해주셨을 때 나는 많은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다. 정년퇴임식을 마치고 불쑥 내게 오셔서는 “박헌명의 정년은 언제지?”라고 물으셨다. 꽃다발 고맙게 받았다, 꾸준히 정진하라는 말씀을 그리 뜬금없는 질문으로 대신하셨으리라. 내가 가장 아끼는 선생님의 말씀은 <자전적 행정학>(1991: 22)에 적으신 다음 문장이다.

“나는 나를 섭섭하게 한 이를 잊고 싶고–또 잊고도 있고–나에게 고맙게 한 이를 잊고 싶지 않다.”

기억하건대 그 책을 쓰시기 전에도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나는 이 말씀이 마치 내가 한 말인 듯 느끼고 있다. 대학시절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체험한 것이기 때문이다.1) 아마도 내가 문장으로 적지 않았다 해도 같은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선생님의 말씀이 마치 내 생각이나 글처럼 그렇게 느껴졌을는지 모른다. 아님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무슨 뜻인지를 곰곰히 생각하다가 마침 그 비슷한 경험을 하고서 깨달음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나를 섭섭하게 한 이를 잊고 싶다”

어쩌면 위 문장은 그냥 어떤 사람의 평범한 소망처럼 들릴 수 있다. 아무 생각없이 문자 그대로 읽는다면 그 속뜻을 알기 어렵고 별다른 감흥을 얻기도 어렵다. 선생님의 말씀이 늘 그러하듯이 그 독특한 맥락의 자락을 잡고 있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먼저 첫번째 문구를 살펴보자. 왜 나를 섭섭하게 한 이를 잊고 싶을까? 사소한 일을 가지고 일희일비하는 소인배가 아닌 대인배가 되기 위해서일까? 성인군자가 되어보기 위함일까? 아마도 정답은 내가 살기 위해서이다. 그 섭섭함을 마음에 담고 산다면 제명을 다하지 못할 것이다. 섭섭함이 화가 되고 분노가 되어 궁극에는 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화병이다.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독재정권에게 참혹하게 당한 사람들이 대개는 오래 살지 못했는데, 그 이유가 화병이었을 것이라고 선생님은 추측하셨다. 사람이 화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가. 그런 화를 마음에 담고 산다면 어찌 멀쩡하게 버텨낼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임에랴…

그런데 누가 섭섭하게 한 이일까? 생각컨대, 박정희나 전두환같은 독재자와 그 떨거지들이 아니다. 섭섭하게 한 자들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해서는 안될 나쁜 짓을 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섭섭하게 한 이는 먹고 살려다 보니 독재자의 지시가 부당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따른 평범한 공무원일 것이다. 지독한 고문과 탄압에 시달린 나머지 독재자에게 대항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억지로 협조하는 사람들이다. 더 가깝게는 민주화운동을 같이 했으면서도 기본 생각이 달라서 민주화 과실을 탐하여 일을 그르친 사람들일 것이다. 동지이기 때문에, 동지였기 때문에 섭섭하지만 그만큼 더 아픈 것이다. 그 사람들을 잊고 싶은 것은 아마도 그 분들의 처지를 인간적으로 긍휼하기 때문이다. “[내가 누려야 할] 최소의 것을 빼앗은 이에 대해서도 최소의 것이 부여되기를 바라는 인간 본연에 대한 흠모”가 있기 때문이다 (이문영 1986: 96). 또한 동지와의 합의를 중요시하고 동지를 비난하지 않으려는 의지이다. “동지들과 같이 일하다가 공은 동지들에게 돌리고 불리한 것은 자신이 담당”하기 때문이다(이문영 1996: 429).

나를 섭섭하게 한 이를 잊고 싶은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최소주의일 것이다. 섭섭하게는 했지만 백번을 양보해도 그들이 나름대로 최소한을 지켰기 때문이다. 최대를 하지 않았어도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해야 할 것을 안하는 것보다 마땅히 안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 더 나쁘다(이문영 1996: 420). 즉, 무엇을 안하는 것이 무엇을 하는 것에 앞선다(404쪽). 조지훈 선생은 “사람은 안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다(이문영 1986: 329). 결국 나를 섭섭하게 한 이는 마땅히 안해야 할 짓은 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무서울 때에도 그 최소한을 버리지는 않은 사람들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동아리에서 경험한 일을 떠올린다. 다수가 동아리의 목적에는 별 관심이 없고 어울려 노는 일(사교)에 몰두한다. 원래 목적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외면을 당하고 비난을 받는다. 모두가 나처럼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화가 났다. 애초부터 합의한 일을 하자는 요구를 다수와 학번으로 무시하고 핍박하는 것이 문제였다. 우연히 여자 동기생이 일을 담당한 임원으로서 내 일에 관심을 가지고 걱정해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애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에 더 열심이었음이 분명하고, 그 관심이라는 것도 최소한 수준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래도 나를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최소한 동배임을 저버리지 않았다. 나는 눈꼽만치도 섭섭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 참으로 어려울 때에 그런 동배조차 없었다면 나 자신이 너무 서글퍼졌을 것이다. 섭섭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애의 최소한이 고마왔다. 은연한 애정을 느꼈다. 이 땅의 많은 “알뜰한 당신”들이 그 애처럼 지켜야 할 최소를 간직하고 살았기 때문에 그나마 이 나라가 이 정도라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나를 섭섭하게 한 이를 잊고 그들이 보여준 최소에 감사한 것은 나를 번뇌에서 자유롭게 했고, 이성과 상식에 머물게 해서 지나친 선택(폭력)을 하지 않도록 했다.

나는 선생님께서 적으신 “–또 잊고도 있고–”라는 표현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잊으려고 노력을 하셨나를 잘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섭섭하게 한 이를 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동지였다면 더 섭섭하고 잊는 일이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도 모두 잊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정말 그렇게 잊으려고 애쓰고 있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정말 “지켜야 할 최소를 지키려 하는 최소주의자였다”(이문영 2008: 150). 아마도 김석중 사모님께서는 섭섭하게 한 이를 차마 잊지 못하셔서, 그만큼 원망이 깊어서 마음에 병을 얻으셨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석중은 … 정권을 바로잡지도 못하면서 관직에 들어간 재야 동지들을 민주화 후에 강자에 붙어먹는 사람들이라고 매도해 왔다”(이문영 2008: 187).

“나에게 고맙게 한 이를 잊고 싶지 않다”

이 문구는 앞 문구와 대조를 이룬다. 신세를 진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섭섭하게 한 이를 잊는 것보다 더 쉽다. 왜냐면 나에게 고맙게 한 이를 기억하는 것은 고통이 아닌 관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은혜를 베푼 것을 잊지 않고 보답하는 사람의 기본 품성에 관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어려울 때 신세를 진 이를 잊고 살거나 오히려 배신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왜 구태여 이런 상식에 가까운 말씀을 하셨을까?

선생님에게 고맙게 한 이는 단순히 고마운 사람이 아니다. 가장 어려운 시절에 利가 아닌 義로 이심전심이 된 사람들이다. 무서운 시절에 독재자의 감시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쌀을 보내주고 돈을 보태준 분들일 것이다(이문영 1991: 22). 그 도움 자체가 크지 않더라도 그 암울한 상황에서 박해를 무릅쓰고 손을 내밀어준 그 자체가 눈물나게 고마운 것이다. “사람의 진정한 값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 (이문영 2008: 78). “한계상황에 사는 사람만이 그 최소마저도 상실된 상태에서의 존재를 음미할 능력이 있다”(이문영 1986: 96). 최소의 것을 빼앗겨본 자는 꼭 필요한 최소를 내어준 고마움을 차마 잊을 수 없다. 또 다시 선생님의 최소주의다.2) 가장 필요한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을 베풀어준 은혜를 최소한(갚지 못한다 해도) 잊지는 않겠다는 것 아닌가. 그만큼 선생님께서 참담하고 혹독한 세월을 치열하게 참고 견디어오셨다는 뜻이다.

나는 동아리의 취지에서 벗어나는 일에만 몰두하는 행태를 비판했다. 회원들은 이런 나를 탐탁치 않게 생각했고,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해 했다. 모여서 손가락질을 하고 비난을 쏟아냈고, 급기야 나를 쫓아내려 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행동했지만 세상은 모두 나를 외면하고 배척하고 있었다. 이런 느낌이 얼마나 사람을 좌절하게 했던가. 공식모임에서 나는 마지막 발언을 마치고 모든 기운을 소진한 듯 자리에 앉았다. 어떤 미련도 기대도 갖지 않았다. 그때 평소에 과묵하던 선배 한 분이 걸어나와 차분한 어조로 발언을 하셨다. 그를 몰아세우기 전에 스스로 우리가 어떠했는가를 돌아봐야 한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그의 비판에 떳떳했는가, 성찰도 없이 대안도 없이 몰려다니며 사람 하나를 낙인찍어 쫓아내면 그만인가 그는 물었다. 냉정을 되찾아 모두가 반성할 것을 권고했고, 그는 책임을 느낀다며 상임위원 직을 스스로 사퇴했다. 이 최소한의 발언에 아무도 감히 토달지 못하였다.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냥 앉아만 있었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비폭력과 최소주의와 자기희생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말이었음을 기억한다. 그후 나는 그 분을 나에게 고맙게 한 이로 알고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다. 그냥 고마운 이가 아니라 최소를 다투는 한계상황에서 어둠을 걷어내고 진리를 살려냈으니 가슴에 사무치게 고마운 분이다.

“고-마-워…”

나는 2013년 12월 말 고대병원에 가서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힘든 고비를 넘기신 직후였다. 아무 말씀도 없이 내 얘기를 힘겹게 들으셨다. 편히 쉬게 해드리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려는데, 물끄러미 지켜만 보시던 선생님께서 내게 숨을 내쉬듯이 말씀하셨다. “고-마-워…” 나는 마지막 말씀임을 직감했다. 해드린 것이 없어서 항상 송구스러운 제자를 기억해주신 것이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간절한 느낌으로 들었고, 끝까지 잊지 않으려 애쓰시던 모습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그 순간 정년퇴임식을 떠올리셨는지 모른다. 다른 선생님들과는 달리 누구에게서도 꽃다발과 축하인사를 건네받지 못하셨다. 내 차례까지 올까 싶어 꽃다발을 안고 내심 초조했던 나는 얼마나 황망했던가.

하지만 고맙게 한 이는 내가 아니라 선생님이셨다. 가장 번뇌하고 혼란스러워할 때 내게 한줄기 빛처럼 의지가 되어 주셨다. 비폭력과 최소주의라는 가르침은 군대와 외국생활에서 위기에 처했던 나를 지켜주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의미없는 숫자놀음으로 강자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지 않을까 걱정해주셨다. 투석중인 상황에서도 이제 좋은 색시를 만나야 한다며 마음을 써주셨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색시를 데리고 가서 인사시켜드린 것이 내가 가장 잘 한 일이었던 것같다. 근심을 조금이나마 덜어드린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다. 나는 물론이려니와 많은 사람들에게 고맙게 한 선생님을 나는 잊지 않으려 한다. 마지막까지 진솔하고 간절하셨던 바로 그 마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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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중학교 국어선생님께서『論語』學而篇을 인용하시면서 曾子는 하루에 세 가지를 반성한다(吾日三省吾身)고 했는데, 너는 무엇을 반성하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단지 오늘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는가를 반성한다고 답했다. 어떤 연유로 그렇게 답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선생님의 비폭력과 최소주의와 맥락이 맞닿아 있음을 나중에 깨달았다. 남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해도 최소한 폐가 되지는 않겠다는…

각주 2) 선생님의 <겁많은 자의 용기> (2008)를 읽고 감동한 전라도의 한 치과의사가 선생님의 치아를 치료해 드렸다고 한다. 정신이 혼미해진 상황에서도 선생님은 그 여의사 일을 종종 말씀해 주셨다.

박헌명. “나에게 고맙게 한 이를 잊고 싶지 않다.” <최소주의행정학> 1권 5호 (2016년 5월): 1-2쪽

기본

권위란 무엇인가? Barnard 다시 읽기

권위란 무엇인가? 20여년 전 직위가 높은 윗사람의 권위에 도전한 대가代價로 적어낸 반성문의 첫번째 문장이다. 많은 아랫사람들이 보는 데서 윗사람의 체면과 위신을 땅바닥에 패대기친 그 불경을 참회하라는 요구가 있었다. 떳떳한 마음으로 대의를 선택하기로 하고 나는 두번째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권위란 그 자리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황당한 반성문을 읽어본 어느 상급자가 혀를 끌끌 찼다. 반성문을 가장한 훈계문에 당혹해하면서도 차마 나무라지 못하는 심경을 그의 낯빛에서 읽었다. 나는 어쩌다가 이런 “불경스런 반성문”을 적었을까?

무관심영역? 수용영역?

이문영은『인간 종교 국가』(2001: 388)에서 “바너드(Chester I. Barnard)는 1938년에 저술한 Functions of the Executive에서 하급자의 무관심영역(zone of indifference)를 말했다. …  위사람이 마구 눌러대면 아랫사람이 무관심해지며(indifference), 윗사람의 명령을 받아들이는(acceptance) 영역이 한정된다는 말이다”라고 적었다. 이에 앞서 “윗사람이 아무리 설쳐도 아랫사람이 무관심하면 일이 안된다는 바너드의 말, ‘무관심영역’(zone of indifference)을 이어받아 ‘수용영역(zone of acceptance)이라는 말을 만든 사람이 시몬이다. 바너드는 윗사람이 명령을 내려도 그 명령을 아랫사람이 실천할 수 없는 명령이거나 그 명령의 실천이 아랫사람의 이해관계와 어긋나거나 그 명령이 조직의 목적과 어긋나면 아랫사람이 무관심해진다고 보았다”(47쪽)라고 설명했다.

아마도 선생님은 “Indifference”를 문자그대로 무관심으로 해석해서 Barnard의 뜻을 조금 오해하신 것같다. 이 zone of indiference는 아랫사람이 무관심해지는 영역이 아니라 윗사람의 권위를 의심하지 않고 명령(의사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영역이다. 원문은 “[T]here exists a ‘zone of indifference’ in each individual within which orders are acceptable without conscious question of their authority” (Barnard 1968: 167) 로 되어 있다. 같은 맥락에서 Simon (1997)은 zone of acceptance를 설명하면서 “… whenever [a subordinate] permits his behavior to be guided by the decision of a superior, without independently examining the merits of that decision” (10쪽)과 “an area of acceptance in behavior within which the subordinate is willing to accept the decisions made for him by his superior” (185쪽) 라고 적었다.

그러니까 수용영역은 명령의 적절성을 일일이 따질 필요가 없을만큼 합당한 것이어서 아랫사람이 군소리없이 그냥 명령을 받아들이는 영역을 말한다. 어떤 명령이 그 영역 안에 있는 한 아랫사람은 의심하지 않고 순수하게 그 명령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윗사람이 내리는 명령을 아랫사람이 받아들이는 정도를 순서에 따라 정렬하면, (1) 명백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는 명령, (2)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unquestionably acceptable)  명령, 그리고 (3) 그 중간선에 있어서 가까스로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명령이 있다(Barnard 1968: 168-169). 두번째 부류가 바로 수용할 만한 범위(range) 안에 있는 명령인데, 아랫사람은 그 명령이 무엇인지 상관하지 않는다 (윗사람의 권위를 의심하거나 정당성을 따지지 않는다)(169쪽).

그래서 Barnard의 zone of indifference (상관안하고 받아들이는 영역)은 Simon이 Administrative Behavior (1997)에서 표현한 수용영역(zone of acceptance)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1) 어차피 Barnard의 설명에도 acceptance가 핵심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인간 종교 국가』(2001)에 있는 표현은 “위사람이 마구 눌러대면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명령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영역에서 벗어나게 되어 윗사람의 권위가 의심받게 된다는 말이다,” “윗사람이 아무리 설쳐도 아랫사람이 의심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명령을 내려야 일이 된다는 바너드의 말,” “… 그 명령이 조직의 목적과 어긋나면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을 벗어난 명령이기 때문에 아랫사람이 받아들이지도 따르지도 않는다” 정도로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권위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권위란 무엇인가? Barnard (1968)는 권위를 “the character of a communication (order) in a formal organization by virtue of which it is accepted by a contributor to or ‘member’ of the organization as governing the action he contributes” (163쪽)로 정의했다. 사람들(아랫사람)의 동의를 얻어야 권위를 세울 수 있다는 말이다. 어떤 명령이 그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1) 아랫사람이 그 명령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2) 조직의 목적과 불일치하지 않아야 하고, (3) 자신의 이해관계와 부합해야 하고, (4) 정신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따를 수 있어야 한다(165쪽). 물론 권위는 개인의 주관이란 관점에서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객관이라는 관점에서 조직 내에서 의사전달 체계(channels of communication)를 통하여 공식성 “acting officially”을 가지고 행사되는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163, 172쪽).

요컨대, Barnard는 권위가 위에서 아래로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명령과 지시가 아니라 아랫사람 개개인의 판단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았다 (Golembiewski and Kuhnert 1994: 1210-1211). 권위가 자리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상하 관계에서 나오기 때문에, 단지 명령을 내린다고 해서 자동으로 명령이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아랫사람이 받아들였을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Fry 1989: 168). Barnard는 위사람에 방점을 둔 기존의 권위와 다르게 아랫사람의 관점을 강조했는데, 그의 견해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권위는 다듬고 가꾸는 것이다

왜 나는 권위가 자리에서 자동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적었는가? 당시 나는 Barnard (1968)과 Simon (1997)을 직접 읽지 못했다. 물론 강의시간에 zone of acceptance를 배웠음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누구보다 절실하게 그 의미를 느낀 것은 대학과 사회생활에서 얻은 경험 때문이다. 왜 사람들은 그 자리에 부여된 책임을 생각하기보다는 권위를 내세우는 것일까? 일을 잘하기 위해 권위를 사용하기보다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 쓰는 것일까? 자신이 권위에 합당한 능력(지식과 기술)을 가졌는지를 따지는데 게으르고, 아랫사람을 무시하고 윽박지르는 데 부지런한 것일까? 일이 잘 되면 자기 공으로 돌리고 잘못되면 아랫사람 책임으로 돌리는 일을 어쩌면 그리도 잘하는 것일까? 결국은 명예롭지 못하게, 혹은 비참하게 자리에서 내려올 것이면서 끝까지 (자리에서 쫓겨난 뒤에도) 그 악습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조직을 망치고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기면서도 반성할 줄을 모르는 것일까? 그런 사람들의 권위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그들이 얼마나 무책임한 사람들인지를 생생하게 관찰하였다.

Barnard (1968)는 자리에서 나오는 권위 (authority of position)와 관리자의 능력에서 나오는 권위 (authority of leadership)를 구분하고, 능력이 출중하지만 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은 권위라기보다는 영향력(influence)을 가진 것이라고 했다 (173-174쪽). 비록 이론 에서 두 권위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을지라도 현실에서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보통은 능력과 자리는 비례한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높은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능력이 없는 자가 높은 자리에 갈 수 있는 확률은 낮다. 이렇게 평가와 상벌이 공정하며 조직 구성원들은 편안하게 일을 잘 할 것이고 조직의 성과는 높아질 것이다. 문제는 능력이 쳐지는 자가 분에 넘치는 자리를 꿰차고 앉아 있거나,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 그 능력에 맞는 자리에 앉지 못하는 경우이다. 멋대로 조직의 유인체계를 조작하여 편을 가르고 내 편에게 부당한 혜택을 베풀어 조직을 흔든다. 자원을 적재적소에 활용하지 못한 조직은 좋은 성과를 낼 수 없다. 개인의 이익을 탐하는 자들이 조직을 망친다.

권위가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는 말은 자리에서 나오는 권위보다 능력에서 나오는 권위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권위가 계서제로 운영되는 공식 조직에서 일어나는 현상인 이상 권위는 물론 자리(직위)에서 시작된다. 일을 잘 하기 위해 책임을 나누어 지는데(분업) 그것이 그 자리다. 권위를 위하여 자리를 만들고 권능 (법률상 능력) 을 주는 것이 아니다. 책임은 권위의 장식품이 아니다. 무거운 책임이 따르는 자리는 거기에 걸맞는 권능이 부여되고 권위는 높고 크다. 자리에서 시작된 권위(권능이라 하자)는 조직도표나 직무분석표에 나와있는 서류상의 권위이다. 실제 권위(자리와 능력에서 나오는 권위의 총합)는 그 자리에 오른 자가 어찌 하느냐에 따라 서류상 권위보다 낮아지기도 하고 반대로 높아지기도 한다.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의 지식, 기술, 도덕성, 체력, 언변, 글쓰는 능력 등을 어찌 잘 활용하느냐가 관건이다. 따라서 실제 권위(의 크기)는 생물처럼 끊임없이 변화한다. 따라서 권위는 그 자리에서 주어진 서류상의 권능이라기보다는 그 자리에 선 사람이 다듬고 가꾸고 개발해나가야 하는 능력이다.

권위는 능력이자 자원이다

권위의 본질은 조직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다. 영향력이다. 또한 권위는 그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돈이나 장비와 같은 소비 자원이 아니다. 쓰면 쓸수록 없어지는 그런 자원이 아니다. 잘 사용하면 늘지만 잘못 사용하면 줄어드는 그런 자원이다.

Barnard (1968: 165, 167)가 지적한 대로 윗사람은 사려깊이 좌우를 살펴서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에 들어갈 만한 명령(의사결정)을  내려야 한다. 단순히 서류상 적힌 권능을 행사한다면 시간이 지나도 권위는 크게 늘거나 줄지 않는다. 하지만 적절한 권능을 행사하여 사람들과 화합하고 조직의 일을 잘 해내간다면 권위는 늘어난다. 자리에서 나오는 권위든 능력에서 나오든 권위든 그 힘을 제대로 사용하는 경우다. 권위 점수는 쌓여갈 것이고 “권위 계좌”의 잔고는 차곡차곡 쌓여갈 것이다.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은 넓어질 것이다. 그만큼 윗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많아진다. 반대로 적절하지 않은 권능을 행사한다면 권위는 줄어든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 수행할 수 없는 명령, 조직의 목표와 개인의 이해관계를 해치는 명령 등은 수용영역에서 벗어난다. 이런 정당성 없는 명령을 강제하면 당장은 어떨는지 몰라도 알게 모르게 권위는 허물어진다. 권위 점수가 깎이고 계좌 잔고가 줄어든다. 아랫사람의 수용영역도 쭈그러 든다. 윗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총알’이 없어진다.

평소에 권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윗사람은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런 윗사람이 어쩌다가 정당한 명령을 내린다 해도 아랫사람의 허용영역은 이미 좁아져서 퇴짜맞기 십상이다. 아랫사람은 그 명령이 정당한지 의심부터 할 것이고, 수행한다 해도 성의를 다하지 않을 것이다. 사용할 수 있는 잔고가 바닥난 윗사람은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을 하던 소년 얘기처럼,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사람들이 더이상 믿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평소에 권위 점수를 많이 쌓아두고 잔고를 넉넉히 채워넣은 윗사람은 좀 더 쉽고 여유롭게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어지간 하면 아랫사람이 그 명령이 정당한지를 따지지 않고 성심성의껏 수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평소와는 다르게 덜 정당한 명령을 내린다 해도 수용영역이 넓고 벌어놓은 권위 잔고가 많기 때문에 아랫사람이 명령을 수행할 가능성이 크다. 윗사람이 자리와 능력에서 나온 권위를 모두 겸비한 경우 아랫사람은 수용영역 밖에 있는 명령조차도 따를 수도 있다 (Barnard 1968: 174). 물론 그만큼 윗사람의 권위 점수는 깎일 것이고 권위 잔고는 줄어들 것이다. 당연히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은 좁아질 것이다.

누가 불경죄를 말하는가?

우리는 사극에서 왕이나 양반을 능멸한 불경죄를 묻는 장면을 종종 본다. 왕의 권위를 세우고 반상 법도를 반듯하게 해야 한다며 핏대를 세우고 아랫사람을 잔혹하게 고문하고 멍석말이를 한다. 그런 장면 대부분은 윗사람이 떳떳하지 못한 경우다. 떳떳한 윗사람은 그 권위를 의심받을 만한 짓을 하지 않는다. 설령 자리에서 비롯된 권위가 부당하게 도전받았다 해도 그런 윗사람은 아량을 베풀고 꼭 필요한 경우에 정해진 절차를 온전히 따르는 방법으로 대응한다. 그러니 무거운 처벌을 내린다 해도 원망이 없고 억울함이 없다. 그 처벌조차 수용영역 안에 있기 때문에 누구도 옳으니 그르니 시비걸지 않는다. 정당하고 공정한 의사결정은 윗사람의 권위를 높일 뿐이다. 그런 윗사람은 스스로 권위니 불경죄니 하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 자체로 권위를 깎아먹는 어리석은 짓이기 때문이다. 대신 행여나 자신에게(자리가 아닌 관리자 능력과 처신에서) 부족한 것이 있었는지를 차분히 돌아보면서 반성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관찰하는 윗사람은 그 반대이기 십상이다. 어느 자리이든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음을 모르는 철부지들이다. 한 자리를 꿰어차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이다. 팔뚝에 찬 완장이 마치 무슨 짓을 해도 괜찮다는 표식인 것처럼 우쭐대고 골목길을 누비는 자들이다. 그 자리가 주는 책임은 망각하고 자리에서 나온 권능이 모두인 것으로 믿고 법대로 하자고 한다. 정당하든 그렇지 않든 자신들은 아무렇게나 명령을 내릴 수 있고, 아랫사람들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바로 받들어 수행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천진난만한 윗사람에게는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이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권위는 윗사람의 몫이지 아랫사람이 참견할 일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른바 “까라면 까”를 입에 달고 다니는 자들이다.

이런 기고만장들은 평소 말과 행실이 비루한 자들이다. 권능만 내세우면서 거드름을 피우다 일이 잘못 되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아랫사람에게 그 책임을 떠넘긴다. 자리가 주는 권능이 아무리 높아도 이런 태도와 처신은 그 사람의 실제 권위를 크게 깎아먹는다. 지식과 기술과 언변이 아무리 좋아도 권위 점수를 벌거나 잔고를 불릴 수 없다.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을 넓힐 수 없다.

국회의 권위가 어쩌니 하면서 청문회에 출석한 참고인을 윽박지르는 장면은 익숙해진지 오래다. 그렇게 권위를 따지는 사람치고 멀쩡한 윗사람인 경우는 극히 희박하다. 대부분은 부적절한 언행으로 쓸데없는 언쟁을 불러일으킨 뒤 그 책임을 참고인에게 떠넘긴다. 소위 “갑질”이다. 청와대에서 걸핏하면 국회를 비난하고 국민을 탓한다. 민주공화국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거나 입법권과 사법권이 국회와 법원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행정부가 제출한 법률안을 통과시켜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판사가 판결을 내리기도 전에 죄를 규정한다. 자신이 진리이고 정답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모두 자기 중심으로 돌고, 또 그렇게 돌아야 한다는 정신줄이다. 한마디로 공화국에서 즐기는 “왕놀이”다. 자신의 의견에 반하는 그 어느 것도 “불경죄”로 다스려야 한다고 믿는 순진무구이다. 자신이 앉아 있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비롯된 권능만 따지고 있다가, 일이 잘못되면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남탓을 할 뿐이다. 지식이든 기술이든 깜냥이 안되는 자가 분에 넘치는 자리를 꿰차고 앉아 주어진 권능조차 무시하고 전지전능한 신처럼 세상을 굴림하려는 격이다.

누가 권위를 허물었는가? 거울을 보라!

모두 똑같은 정신줄이다. 권위가 아랫사람의 수용여부에 달려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앉아있는 자리가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권위가 변화한다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 자리에 앉은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뼛속 깊이 깨닫는데 게으르고 권능만을 내세우는 자들이다. 그 자리가 제공한 권능만 믿고 기고만장하여 무슨 의사결정(명령)이든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아랫사람은 무조건 그 의사결정을 따라야 한다고 확신하는 자들이다. 다른 의견을 용납하지 않고 억압하고 탄압하여 아랫사람들의 신망을 잃을 자들이다. 권위 잔고는 0을 지나쳐 마이너스가 된다. 그래서 더 자신의 권위에 집착한다. 헛된 무리수를 반복하여 쉼없이 아랫사람을 못살게 들볶는 자들이다.

과연 누가 그들의 권위를 허물었는가? 누가 그들의 권위 점수를 깎아먹고 잔고를 바닥내었는가? 그들의 명령에 다른 의견을 제시한 자들인가? 자신의 수용영역을 벗어난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은 아랫사람인가? 못난 윗사람들은 흔히 그런 아랫사람들을 잡아다가 “네 죄를 네가 알렸다!”며 호통을 친다. 하지만 그 “불경죄”는 기껏해봤자 자신의 책임을 피하려는 수작일 뿐이다. 권위를 훼손한 것은 아랫사람이 아니라 서류상 권위만 믿고 날뛴 윗사람 자신이다. 자신의 능력과 도덕성이 그 자리의 무게에 미치지 못해서 자리가 주는 권능조차 보존하지 못하고 다 까먹은 까닭이다. 백성에게 신망을 잃은 왕의 권위가 어떠한지는 역사가 기록하고 있다. 한양을 버리고 도망친 선조와 한강철교를 폭파하고 서울을 버린 이승만을 보라. 그런 못난 왕(혹은 왕노릇을 한)을 험하게 욕한다 한들 누가 백성을 탓할 것인가? 왕이든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스스로 거울을 보라. 거기에 권위를 갉아먹은 암종이 있을 것이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반성문에서 이런 내용을 적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비판을 하고 또 받아들이지 않아서 권위가 바닥에 떨어졌다면, 그런 권위는 내세울 가치조차 없는 것이라고. 만일 자신의 권위가 훼손되고 무너졌다면, 남이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그런 것이라고. 다른 사람 탓이 아니라 스스로 못난 짓을 한 결과라고. 그러니 남탓을 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봐 반성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얼마나 합당하고 정당한 의사결정을 했는지, 얼마나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협조를 구했는지, 얼마나 평소에 언행을 조심했는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이다.

수용영역과『 맹자』의「양혜왕」4장 2

아랫사람의 수용영역의 폭과 크기는 조직이 제공하는 대가가 조직구성원이 기여하는 노력과 희생보다 얼마나 큰 큰가에 달려있다 “… the degree to which the inducements exceed the burdens and sacrifices which determine the individuals’ adhesion to the organization” (Barnard 1968: 169). 또한 명령을 집행할 수 있도록 하는 강제력 “the sanctions wiich authority has availabel to enforce its commands”에 따라 결정된다 (Simon 1997: 10). 예컨대, 군대같은 조직은 강제력(처벌)이 강하기 때문에 일반 조직에 비해 수용영역이 더 넓다 (p.186).

하지만 마피아나 야쿠자가 아니라면 일반 조직에서 권위라는 이름으로 아랫사람을 총칼로 겁박하고 주먹으로 때려서 일을 시키는 경우는 드물다. 군대에서도 군법과 규정에 따라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지 덮어놓고 아무 명령이나 내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Simon (1997: 10)은 “… the superior does not seek to convince the subordinate, but only to obtain his acquiescence”라고 적었다. 설령 부하가 상급자의 명령이 옳은지 그른지 확신할 수 없다 해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 묵인(acquiescence)이다. 상급자가 평소에 올바르게 행동하여 권위를 충분히 벌어놓았다면 전시에 폭탄을 안고 적진으로 뛰어들라는 명령도 부하들이 순응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1980년 5월 게엄령이 선포된 광주에서 공수부대 지위관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라고 지시한 것은 정당한 명령이 아니다. 어린 애들도 본능적으로 해서는 안되는 일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명령이 아닌 장병들의 수용영역에서 한참을 벗어난 사실상 폭력이고 고문이다. 권위도 뭐도 아닌 그냥 살인마의 가혹한 강요일 뿐이다.

어떤 자리에서 비롯된 권능과 강제력 같은 공식성 뿐만 아니라 관리자의 개인 능력에 따라서 아랫사람이 인정하는 수용영역이 달라진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면서 나는 “(백성이) 즐거움을 못얻었다고 해서 그의 上을 비난하는 것도 잘못이며, 백성의 위에 있으면서 백성과 동락하지 않는 것도 잘못이다(不得而非其上者非也 爲民上而不與民同樂者亦非也)”라는『孔孟』「梁惠王」下 4장 2를 떠올리곤 한다. 이문영 선생님은 이 구절을『孔孟 』를 꿰뚫는 문장으로 보았다 (1996: 74, 293, 606; 2001: 70, 147). 나는 이 문장이 Barnard와 Simon의 수용영역과 맥락이 같다고 생각한다. 즐거움을 못얻었다는 것은 上이 제공하는 서비스(정치, 경제, 사회 등)가  民이 기대하는 최대치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에서 民이 上을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上이 民과 同樂하지 않는 것은 上의 최소치이고 同樂하는 것이 최대치이다. 그 최소치조차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은 잘못이다. 民이 上을 비난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上이 최소한 이상을 해야 할 영역이 있다. 그 영역을 벗어나 극단에 이르면 民이 난동을 부리는 것이고, 上이 패도질을 하는 것이다. 이러니 양극단을 경계하는 선생님의 최소주의를 참으로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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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인간 종교 국가 』(2001)에 나오는 “행태론 학자이며 경제학자인 시몬과는 달리 왈도는 정치학을 공부한 행정학자로서…”(436쪽)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Herbert A. Simon (1916-2001)은 시카고대학에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고 정치학은 물론 경제학, 인공지능, 심리학, 컴퓨터학 등으로 학문 지평을 넓힌 분으로 1978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하였다.

참고문헌

Barnard, Chester, I. 1968. The Functions of Executive.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Fry, Brian R. 1989. Chester Barnard: Organizations as Systems of Exchange. In Mastering Public Administration: From Max Weber to Dwight Waldo. 156-180. Chatham, NJ: Chatham House.

Golembiewski, Robert T., and Karl W. Kuhnert. 1994. Barnard on Authority and Zone of Indifference: Toward Perspectives on the Decline of Managerialism. International Journal of Public Administration 17(6): 1195-1238.

Simon, Herbert A. 1997. Administrative Behavior, 4th ed. Free Press.

박헌명. 2016. 권위란 무엇인가? Barnard 다시 읽기. <최소주의 행정학> 1권 4호 (2016년 4월):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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