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안무치”와 “달의 몰락”과 계몽군주

네 자로 된 고사성어가 정치인의 입에 오르는 일은 흔하다. 양반의 품격과 학식은 사자성어로 완성된다고 믿는 것일까? 일부러 투박한 영국식 발음과 라틴어를 고집하는 미국인의 현학이랄까. 물론 꼭 맞는 비유여서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열이면 아홉 이상은 돈주고 족보를 산 양반네들의 싸구려 에헴이다. 고개가 갸우뚱 하다가 손발이 오그라들고 닭살이 돋는다. 조미료가 듬뿍 든 음식을 털어넣은 듯 속이 거북하다. 도포 차림으로 공자왈 맹자왈만 하면 무얼 하는가. 사실도 아닌 일을 어설픈 비유로 힐난해놓고 스스로 대견해하는 모습이라니. 귀여운 구석조차 없는 몹쓸 “아재개그”다. 적개심이 지나쳐 정신줄을 놓은 꼰대들의 작태다. 언어에 대한 테러다.

“추안무치”와 “주안무치”

지난 2일 야당의 원내대표인 주호영씨는 추장관 아들의 병가 의혹을 이어가면서 “한마디로 추안무치”라고 일갈했다. 제 딴에는 후안무치厚顔無恥에서 기가막힌 운율을 따냈다고 생각했을까? 주씨가 추앙하는 윤석열 검찰이 불기소 처분한 사건 아닌가. 그래도 죽은 자식 불알만지기인가? 현실을 부정하고 자신조차 속이려는 몸부림일까?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니 주안무치酒顔無恥 아닌가?

비유 수준을 기하학의 차원에 빗대어 보자. 점은 0차원으로 표현된다. 점을 이은 선은 1차원이고, 가로와 세로로 구성된 평면은 2차원이며, 높이가 더해진 입체는 3차원이다. 대상에 대한 설명은 0차원이라 할 수 있고, 단순 비교는 1차원(“너는 나의 봄”), 공간과 시간 비교는 2차원(“한국의 제갈량”)이다. 말하고 듣는 멋은 3차원의 축이다. 강물처럼 자연스레 흐르고 숲처럼 아름다운 비유를 말한다.

“추안무치”는 0차원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멋과 감동은 커녕 부실하기 짝없는 설명이다. 그냥 말장난이다. 철부지의 “너 시러” 수준이다. 중국 고사를 빌어오고 나름의 운율을 넣었지만, 사실이 아닌 것을 어거지로 비틀어버린 것이다. 게다가 나라를 돌보지 않아 빼앗긴 일과 병사가 병가를 얻은 것(설령 탈영이었다 해도)을 병치시킨대서야… 그저 비난과 저주를 담은 막말을 “아재개그”로 치장했을 뿐이다. 조국을 조롱하는 “조로남불”도 오십보 백보다. 전방위로 조장관의 삼족을 탈탈 털었지만 검찰은 아직도 그의 불법행위를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언론이 어마어마하게 쏟아낸 “가족사기단” “조국펀드” “위장이혼” “표창장 위조”는 도대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지금까지 명백히 드러난 것은 최성해의 가짜 학위와 검찰개혁의 당위성 뿐이다.

<달의 몰락>과 자기기만

작년 수구세력이 김현철의 <달의 몰락>을 끌어들여 문대통령을 비난했다. 황교안씨와 나경원씨가 주도한 자유한국당의 장외집회에서 틀었다는 노래다. 설화舌禍에 휘말린 청와대 비서관 이름이 가수 이름과 같다는 이유로 달의 영어발음인 문(Moon)을 엮어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노래가 무엇을 말하는지 황씨와 나씨는 알고는 있었을까? 멋과 미추美醜와는 담을 쌓은 자들이다. 자신에게 칭찬인지 저주인지 분간을 못하는 천둥벌거숭이들의 어리석음이여… 문재인이 실제 몰락하는 상상이라도 하는지, <달의 몰락>을 들으며(부르진 못하고) 낄낄대는 순진무구함이여… 자학개그다.

자신(수구세력)을 “처음 만났을 때도” “무참히 차버릴 때도” 자신이 짝사랑하는 그녀(국민)는 “탐스럽고 이쁜” 달(문재인)이 좋다는 것 아닌가. 자신과 “매일 만날 때에도” “완전히 끝난 후에도” 그녀는 오매불망 달을 사랑한다는 것 아닌가? 자신은 죽었다 깨나도 그녀에게 눈길 한번 받지 못하고 무참하게 채인다는 것 아닌가? 그녀의 일편단심에 상처받고 질투심과 좌절감에 사로잡혀 연적에게 고약한 주술을 걸고 있다. 제발이지 눈앞에서 사라지든가 죽어나 버려라. 아니 달이 정말로 몰락하는 환영이 보이고 이제 그녀는 내 것이라는 통쾌한 상상이다. 현실도피이자 자기기만이다.

과연 그 저주가 약발이 있었던 모양이다. 작년 “조국대전”이나 올해 “황제휴가”를 통해서 수구 기득권 세력이 사생결단으로 덤벼들었지만, “탐스럽고 이쁜” 달을 좋아하는 그녀의 마음은 한결같으니 말이다. 아무리 파상공격으로 흔들어 대도 문대통령의 지지율이 4할 밑으로 내려가지 않고 있다. 역대 최고치라고 한다.

계몽군주와 식자우환

지난 달 25일 열린 10.4 남북정상선언 기념 토론회에서 유시민 이사장이 김정은 위원장을 빗대어 “계몽군주”라고 표현했다. 시공간을 가로지른 그의 비유는 여러 가지 느낌을 담고 있다. 옛날처럼 해서는 살아남기 어렵겠지, 권력유지를 위해서 어쩔 수 없겠지, 계속 그렇게 해주라(철부지 아이를 지긋이 타이르는 꼬드김이랄까), 그래도 왕은 왕이다 등… 수구세력들은 폭군을 칭송한 요설이라고 비난했다. 맥락도 빼고 배경 지식도 빼고 막무가내로 빨갱이칠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단장취의 신공이다. 화자는 가벼운 비틀기로 멋을 냈는데 청자는 문자를 트집잡아 죽기살기로 달려들고 있으니…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했거늘. 이런 식이면 양상군자梁上君子는 도둑을 고무·찬양한 발언인가? 유이사장은 (수구세력들에게) 너무 고급스러운 비유를 했다며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고 했다. 0차원도 버거운 자들이 어찌 3차원의 입체감을 알겠는가.

“추안무치”나 “조로남불”이나 수준 미달이다. 정신 건강을 해치는 말고문이다. 폭행에 가까운 말폭력이다. 이런 문화·예술 테러는 대개 수구 기득권 세력의 몫이다. 배운 게 없어서가 아니다. 간절하게 땀흘리고 피흘리고 눈물을 떨구고 기쁨을 나눠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희노애락을 예쁜 꽃으로 그려내고 멋진 가락으로 뽑아낼 수 없는 사람들이다. 정오차의 <바위돌>을 금지시키고, 이창동의 <시>를 낙제시킨 자들이다. 그동안 완장을 차고 모든 것을 맘대로 주물러왔기에 자신의 특권(반칙)을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이 낯설고 원망스럽다. 기가 막히다고 확신한 비유가 전혀 먹히지 않는 현실이 서럽고 화난다. 기득권 놀음에 빠져 스스로 퇴화된 줄도 몰랐던 것이다. “말의 형식을 빌린 폭력”(1991: 322)이 소음이 되고 악취가 되고 흉기가 되어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추안무치”와 <달의 몰락>과 계몽군주. <최소주의행정학> 5(10): 1.

“황제휴가” 공작과 군지휘관의 권위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곤욕을 겪고 있다. 카투사로 복무하던 아들 서씨가 휴가 중에 무릎수술을 한 일을 두고 수구세력들이 일제히 “황제휴가”라며 매일 동네방네를 들쑤시고 있다. 서씨와 당직 사병이 통화를 했는지, 관련 서류가 왜 빠졌는지, 추장관이 국방부 민원실에 청탁을 했는지를 따지고 있다. 문제가 없다는 여당과 특혜라는 야당의 난타전에 신문사와 방송사들이 미소를 머금고 공방을 부채질을 하고 있다. 작년 조국 사태와 같은 양상이다. 의혹이 의혹을 낳고 폭로가 폭로로 이어지는 사이 사실과 진실은 설 곳이 없다.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이 떨어지자 야당은 기다렸다는 듯이 추장관과 문대통령을 압박하고 나섰다.

어리석은 분탕질에 혀를 차다

나는 그저 혀를 찰 뿐이다. 수구세력의 의혹에 손을 들어줘서가 아니다. 서씨 측의 해명이 말끔해서도 아니다. 몇 달째 지속된 COVID-19 사태로 전 국민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대체 지금 뭐하고 있는 것인가. 사병의 병가가 대체 뭐길래 이러는가? 대학총장의 표창장이 대체 뭐길래 이 난리인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전 국민이 표창장을 어찌 위조하는지, 군대에서 어찌 병가를 연장하는지를 공부해야 하나? 오로지 자신의 잇속을 차리기 위해 나라의 재물을 없애버리는 짓이다. 조국 사태에서 본 어리석은 분탕焚蕩질이다.

공익을 위해 폭로를 했다는 장교나 사병 모두 분수에 맞지 않는 언행을 하고 있다. 서씨의 부대 배치와 통역병 선발에 관련한 청탁을 받았다던 당시 주한미군 한국군지원단장은 이번 일을 주도한 신원식 의원의 참모장이었음이 밝혀졌다. “제가 직접 추미애 남편 서 교수와 추미애 시어머니를 앉혀 놓고서 청탁을 하지 말라고 교육을 40분을 했다”고 했지만, 사실은 신병교육 수료식에 참석한 모든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었다. 정말 여당 대표의 청탁을 받았다면 사안이 엄중한 만큼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어야 했고, 정말 탈영이었으면 헌병에 통보하여 즉시 잡아들였어야 했다. 그런데 이제와서 정의니 공정이니를 입에 담다니, 영관급이나 했다던 자의 언사가 이리도 가벼워서야 어디… 말똥 계급장이 아깝다. 당시 서씨가 미복귀한 사실을 보고받았고 서씨와 통화까지 했다는 당직 사병은 국회에서 증언을 하겠다고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일개 사병이 인사권을 가진 장교가 결정한 휴가가 맞냐 틀리냐를 따지겠다는 것 아닌가?

의혹제기가 아니라 정치공작이다

서씨는 입대 전에 한쪽 무릎을 수술했고, 입대 후에 다른 쪽 무릎이 아파서 휴가를 얻어 치료했고, 여의치 않아 병가를 더 얻었고, 그것도 부족해서 부대의 의견에 따라 개인 휴가를 사용했다. 이런 저런 말은 많지만 중요한 것은 (1) 정말 수술해야 할 정도로 아팠고, 정말 수술했는가와 (2) 부대장이 정당하게 승인을 했느냐이다. 서씨가 주장한 대로 수술한 사실을 병원과 검찰이 확인해줬고 해당 부대장도 병가를 승인을 해줬다고 했다. 여든 야든 이 두 가지에 이견이 없다. 그런데도 절차가 어떻고, 서류가 어떻고, 전화를 했네 안했네 그러고 자빠져 있으니 한심하다.

정말 문제를 삼을 만한 상황은 사병이 꾀병으로 휴가를 얻거나(실제 수술을 안했거나 허위 서류를 제출했거나), 부대장이 부당하게 휴가를 내주는(부모에게 뇌물을 받고 사병의 편의를 봐주는) 경우다. 또한 긴급한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진단서에도 불구하고 부대장이 정당한 이유없이 휴가를 허락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개 부대장들은 병가에 대해 관대한 편이지만 (정말 병사가 아픈 것일 수도 있다는 우려에서), 가끔씩 역겨울 정도로 잔머리를 굴리는 사병이나 성질이 괴팍한 지휘관들을 보게 된다. 군대 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다들 한두 번씩은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서씨가 수술한 것이 맞고 인사권자가 병가를 승인했다면 더 따질 일은 없다. 나머지는(전화로 했든 전자우편으로 했든, 명령서가 언제 발급되었든) 곁가지일 뿐이다. 만일 부대장이 서씨의 병가를 허락하지 않았다면 부하 장병들의 비난은 물론 법적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끊임없이 언론을 통해 재생산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역량이 COVID-19가 아닌 부질없는 이전투구에 소진되고 있다. 나라야 어찌 되든 말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권을 흔들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내고야 말겠다는 수구세력들의 결연함과 다급함이 느껴진다.

군대의 기강과 지휘관의 권위를 허무려는가?

음흉한 분탕질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지치게 한다. 침소봉대로 사람을 짜증나게 만든다. 중요하고 사소한 것을 헷갈리게 한다. 군대에서 중요한 것은 계서제에 기반한 엄격한 지휘체계를 유지하는 일이다. 지휘관의 권위가 무너진 군은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 권위주의에 찌든 적폐는 배격해야 하지만, 군지휘관의 지위를 흔들어서는 안된다. 노무현을 비난할 수는 있지만 대통령이라는 그 자리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기강을 무너뜨리는 짓이다. 인사권을 가진 부대장이 결정한 사안을 정치꾼들이 옳으니 그르니 왈가왈부해서는 안된다. 자해행위다. 물증도 없이 황제휴가라고 몰아붙이면 병가를 승인한 지휘관은 뭐가 된단 말인가? 그것도 한때 장군노릇을 해봤다는 자가 책임자도 아닌 장교와 당직 사병을 앞세워 지휘관을 능욕하고 있으니… 앞으로 휴가는 당직 사병의 결재를 받으라는 소리인가? 권위도 재량도 부정된 부대장이 어찌 장병들을 이끈단 말인가. 포탄이 떨어지고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지휘관의 공격 명령이 맞네 틀리네, 명령서가 있네 없네 미주알 고주알 따지고 있으니… 누가 국민의 군대를 허물고 있는가?

수구세력은 무슨 해명이나 조사결과가 나오든 불리한 내용이면 믿지 않을 것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군대가 망하든 말든 상관없다. 법치나 공정은 장식품일 뿐이다. 조민을 부싯돌로 삼아 조국을 불쏘시개로 태웠듯이 서씨를 미끼삼아 추장관을 얽어매고 있다. 어떻게든 질질 끌면서 여론의 파도에 휩쓸려가는 꼴이나 즐기려는 고약한 심보다. 코로나 상황에서도 끊임없는 공작질에 두 눈을 부릅뜨고 깨어있어야 하는 백성들의 고달픈 삶이 애처롭다. Sojeong

인용하기: 박헌명. 2020. “황제휴가” 공작과 군지휘관의 권위. <최소주의행정학> 5(9): 1.

정부는 왜 주택시장에 개입하는가?

주택시장이 시끄럽다. 정부가 수차례 대책을 발표해왔지만 아파트 가격이 치솟고 전세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며 아우성이다. 수구세력은 정부가 시장에 맞서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누더기처럼 덕지덕지 발라놓은 각종 정부 규제를 철폐하고 시장 논리에 맡겨야 한댄다. 내 돈으로 집을 사고 파는데 왜 정부가 시비를 거냐는 얘기다. 수구세력은 주택 정책이 총체적으로 실패했으니 국토부 장관을 갈아치우라며 악다구니를 쓰고 있다.

주택시장은 왜 실패하는가?

왜 정부가 주택시장에 개입하는가? 경제학의 논리로 치면 시장실패다. 주택시장에서 공정한 주고 받기가 잘 안된다. 완전한 경쟁이 어려운 상황에서 가격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서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구체적으로 주택은 (1) 대부분 개인이 아닌 독과점 기업이 자재를 생산하고 집을 짓고(불완전 경쟁), (2) 일반 소비자는 품질과 가격이 적정한지 정확히 알기 어렵고(비대칭 정보), (3) 외부효과를 관리하기 어렵다. 요컨대, 주택은 시장이 실패하기 쉬운 재화다. 물론 정부가 개입한다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정부는 어떻게 시장에 개입하는가?

첫째, 옛날과는 달리 요즘에는 개인이 아닌 주택(도시)공사나 건설 회사가 주로 집을 짓는다. 물론 개인이 설계와 시공 과정에 적극 참여하기도 하지만 드문 경우다. 집을 짓는 기술과 자금과 법절차가 중요한 요소가 되면서 공급자인 기관(회사)이 우위에 서게 되었다. 독과점을 형성하는 이들이 주택 공급량과 품질과 가격을 주도하게 되었다. 뙤약볕이 내리쬐도 수많은 사람들이 아파트 맛보기집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까닭이다. 이에 정부는 주택 공급에 관련한 인허가, 입찰담합, 분양가, 부실시공 등에 개입한다.

둘째, 일반 소비자는 정해진 선택지(입지, 상표, 크기, 디자인, 가격 등)에서 고를 수밖에 없다. 얼마나 좋은 자재를 썼는지, 얼마나 마무리가 잘 되었는지, 제시된 가격이 적정한지를 판단하기 어렵다. 건설사들은 원가공개와 후분양제를 꺼리기 마련이다. 원가를 낱낱이 공개하면 큰 이득을 취하기 어렵고, 집을 다 지은 후에 분양하게 되면 스스로 자금을 조달하고 품질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일반인은 관련 법규정이나 행정절차나 시장 상황을 잘 알지 못한다. 언론이나 세무사나 중개사에게 의존하기 마련이다.

주택시장에서 독과점과 정보 비대칭성은 애초부터 강자와 약자가 구조화되어 있음을 뜻한다. 정치, 사법, 행정, 경제, 사회, 언론, 대학 등에서 가진 자들이 권력과 돈과 정보로 시장을 왜곡하고 약자들을 농락하기 쉬운 판이다. 주택 정책에 관련된 정치인, 공무원, 언론인, 기업인 등이 거의 언제나 재미를 보는 까닭이다. 아무나 몰려다니며 아파트를 쇼핑하고 어느날 갑자기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아니다. 주택시장의 생리(취약점)를 잘 알고 활용법을 꿰고 있어야 한다. 일반 소비자들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이에 정부는 주택 품질에 관한 기준과 분쟁관리 절차를 마련하고, 아파트 가격과 전월세 가격 등을 정확히 알리고, 다운계약이나 가격담합이나 허위매물과 같은 교란행위를 억제한다. 기울어진 주택시장에서 정보 격차를 줄이고 시장 질서를 바로잡는 조치다.

세째, 시장은 정당하지 않게 이익이나 불이익을 주는 외부성(externality)에 무기력하다. 주택 가격에는 주변 기반시설과 환경 조건이 반영되어 있기 마련인데, 사람들은 이익은 공짜로 누리고 손해는 절대로 안보려는 태도를 보인다. 주변에 도로나 공원이 생기면 하늘에서 떨어진 복(당연한 내 것)이라 여기고 공해를 배출하는 공장이나 혐오시설이 들어서는 것은 결사 반대한다. 시설주는 측정하기 어려운 피해와 불만을 외면한다. 특히 공공시설과 건물이 밀집해있는 대도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당한 이익은 대개 가진 자들이 보고 부당한 비용(피해)은 대다수 시민이 나눠진다. 정부는 도시계획을 세우고, 각종 개발로 발생한 이익을 환수하고, 공해나 기피 시설에 대해 비용을 물려야 한다.

집은 소유가 아니라 소비하는 것이다

집은 오래 사용되는 내구재(durable goods)로서 값이 비싸다. 가진 자들의 놀잇감이 되기 십상이다. 중요한 것은 음식과 옷처럼 집은 생활필수품이다. 누구에게나 최소한의 주거는 보장되어야 한다. 주거 비용이 지나치게 높으면 개인이나 사회나 탈이 날 수밖에 없다. 다른 소비가 줄 수밖에 없고 경제활동이 위축된다. 또한 집은 가격탄력성이 적기 때문에 장기 공급계획이 필요하다.

현재 주택수가 가구수를 초월하여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고 있다. 공급보다는 주택 분배와 수요에서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 사람이 집을 2천 채나 가지고 있거나, 10채 이상을 소유한 사람이 4만명이나 된다면 심각한 문제다. 하물며 소위 “갭 투자”로 남의 돈을 빌어다가 집투기를 하는 일임에랴… 집이 부를 축적하는 확실한 수단으로 인식되는 한 수백만 채를 짓는다 해도 아귀餓鬼같은 탐욕을 채울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은행대출을 규제하고 세금(취득세, 보유세, 양도세 등)을 올리는 조치는 불가피하다. 미국과 일본에 비하면 지금의 “세금폭탄”은 아직도 약하다. 다주택자에게 무겁게 세금을 물려야 한다. 전기료와 물값을 올려 불필요하거나 불합리한 수요를 누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정말 심각한 상황에서는 일부일처제처럼 사실상 가구당 한 채로 제한할 수도 있다. 자본의 자유보다는 주거 안정(생존)이 더 중요하다.

주택 문제를 시장에 맡겨두라는 소리는 약육강식 논리이다. 지금까지 시장을 휘젓고, 그 아수라장에서 배를 불린 수구 기득권의 밥투정이다. “전세절벽”이나 “패닉바잉”이라며 선동하는 짓이다. 이제 집을 소유가 아닌 소비라는 관점으로 봐야 한다. 자식에게 물려줄 금덩이가 아니라 일생 동안 사용하는 필수품이다. 쫓겨날 걱정없이 월세를 살면서 생산적인 일과 인간다운 생활에 집중하면 안되는가? 집값이 좀 내리고 전세가 없어지면 세상이 망하나? 대체 언제까지 “로또 분양권”과 투기질에 휘둘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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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하기: 박헌명. 2020. 정부는 왜 주택시장에 개입하는가? <최소주의행정학> 5(8): 1.

소니왕조의 몰락과 삼성왕조의 위기

수년 전 우연한 기회에 일본 소니 회장을 역임한 분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과거 1990년대까지만 해도 천하를 호령했던 “소니왕조”가 어떻게 몰락해 왔는지를 경영자 시각에서 회고했다. 문득 난생 처음으로 소니 워크맨(Walkman)을 사서 산으로 들로 다녔던 90년대 중반을 떠올렸다. 오토리버스 기능에 흡족해 하면서 이승환의 <천일동안>을 테이프가 닳도록 들었던 군대시절이다.

소니의 몰락은 앞선 일본 민주주의 때문?

연사는 소니가 시장의 변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덩치가 커서 쉽게 움직이기 어려웠다고 했다. 지금까지 해오던 것을 바꾸기 싫어하는 일본인들의 정서도 지적했다. 국제화를 위해 해외지사로 발령을 내면 직원들은 좋아하기는 커녕 좌천된 사람처럼 사표를 냈다고 했다. 그런데 강연이 끝날 무렵 노신사는 불쑥 삼성과 LG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은 민주주의 국가여서 소니가 각종 법규를 준수하느라 힘을 소진했지만, 한국은 민주주의가 허술해서 삼성과 LG가 법질서에 신경쓰지 않고 시장에만 집중했댄다. 정부 규제에 손발이 묶인 소니가 불법과 탈법을 넘나들며 활개치는 삼성과 LG와 경쟁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소니의 몰락을 이렇게 풀어낸 것이 흥미롭긴 했지만 솔직히 나는 어이가 없어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이명박근혜 시절이라지만 이런 소리를 들으니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이씨왕조”를 위한 삼성의 뒤집기

그런데 그 노신사의 말이 그저 터무니없는 낭설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점점 하게 되었다. 1996년 삼성 이건희씨가 아들 이재용씨에게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편법으로 증여했다는 사건부터 2016년 이건희씨의 성매수 사건과 최근 이부진 이재용 남매의 프로포폴 상습투약 사건까지 복기해 보면 공화국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이씨왕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씨들에게 헌법과 법률은 있으나 마나한 것이었다. 그들이 못할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 누구도 감히 토달지 못한다는 “쩐”의 자신감이 묻어난다. 삼성은 이씨들이 싸질러놓은 일이 무엇이든 묵묵히 뒷치닥거리하는 머슴이었다. 누가 봐도 불법이고 탈법이고 구역질나는 일을 합법으로 세탁하는 “뒤집기”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2005년 이상호 기자의 “삼성 X파일” 폭로와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폭로는 엉뚱하게도 제보자의 실형과 노회찬씨의 의원직 박탈로 막을 내렸다.

나는 2007년 삼성중공업 선박이 태안에서 일으킨 기름유출 사고를 보면서 삼성의 호도질과 무책임에 절망했다. 2016년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삼성 이씨왕조”의 민낯을 고스란히 보았다. 참여연대에 따르면 삼성전자에 지분이 없던 이재용이 경영권을 물려받기 위해 2015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을 무리하게 합병하였다. 에버랜드 토지가치가 높게 매겨지고 실체없는 제일모직 바이오사업부의 가치가 과대평가되었다. 삼성바이오로직스(삼바)가 회계기준을 바꾸어 자본잠식을 감추었고, 자회사인 바이오에피스에 대한 미국 바이오젠의 콜옵션을 숨겼다. 합병에 꼭 필요한 국민연금의 동의를 얻기 위해 박근혜의 탈을 쓴 최순실에게 말이며 돈을 건넸다. 또 대놓고 검찰의 조사를 방해하고 증거를 인멸했다. 2019년 삼바는 공장바닥에 회계에 관련된 서버와 랩탑을 숨겨 세상을 경악시켰다. 중정과 안기부의 패악질이 삼성의 미전실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삼성의 뒤집기는 약발이 여전하다. 지난 6월 26일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원회는 이재용에 대한 불기소와 수사중단을 결정했다. 이씨가 아니라면 벌써 수십 번은 구속되고 수십 년을 감옥에 있어야 할 죄가 아닌가.

이씨왕조의 죄악과 삼성장학생의 추억

소정 선생님은 <창세기>의 5대 설화를 통해 악은 (1) 언론 탄압(말을 못하게 한다), (2) 정치경쟁자 제거, (3) 일반 국민의 타락, (4) 전시효과를 노린 사업 추진, (5) 체제 비대화와 인접 국가의 정벌로 진전된다고 했다(1991: 87-103). 삼성왕국이 걷고 있는 그 길이다.

첫째, 이씨와 삼성을 비판하는 일이 힘들거나 위험하다. 삼성은 영향력이 있는 정치인, 언론인, 판사, 검사, 관료, 변호사 등을 관리해왔다. 삼성의 눈에 거슬리는 기사를 찾아보기 어렵다. 양들의 침묵이다. 삼바수사가 한창일 때 검찰과 언론은 “조국때리기”로 국면을 바꾸었다. 이건희의 성매수 촬영죄만 묻고 이재용의 프로포폴 제보자만 구속하였다. 사회 구석구석에서 암약하는 “삼성장학생”들의 활약상이다. 둘째, 유독 실적과 1등에 집착해서 경쟁 기업이 남아나질 않는다. 기술이 좋아서가 아니라 수단방법 안가리고 힘으로 경쟁자를 찍어 눌렀다. 규모의 경제를 넘어선 그냥 강자 물량공세와 갑질이다. 소니 회장의 지적이 아픈 대목이다. 세째, 이씨들이 무슨 짓을 해도 일반 시민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기사, 방송, 조사, 기소, 판결이 쏟아진다. 사람들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며 옳게 살고자 하는 의욕을 상실한다. 힘의 논리를 날것 그대로 체득하여 누구든 약자에게 행패를 부린다. 네째, 임직원들이 작정을 하고 노조를 망가뜨리고 공장에서 병을 얻은 직원들을 십 수년 방치했음에도 세계 1위도 모자라 “초인류 경영”이라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 삼성이 망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주술을 퍼뜨린다. 바벨탑이다. 이씨들이 감옥에 있을 때 삼성의 주가가 오르는데도 나라와 경제를 위해 석방하고 사면해야 한댄다. 나라가 정말 그 지경이면 그 나라는 진작 망했어야 한다. 다섯째, 뒷치닥거리 비용이 커지고, 혁신은 시들고, 시장은 돌아선다. “삼성이 만들면 안산다.” 그동안 밟혀왔던 다른 기업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한마디로 권력이 금력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과거 왕조와는 달리 총과 칼이 아니라 돈다발을 들이밀고 복종을 강제하고 있다. 주군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호위무사의 기개일까? 상식과 양심을 팔아넘긴 비루한 인간의 궁상일까? 삼성장학생의 뒤집기가 사람들의 한숨이 되고 분노가 되고 저주가 되고 있다. 노아의 홍수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부르고 있다. 소니가 시장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것처럼 삼성도 세상물정 모르고 짜릿한 뒤집기에만 취해있는 것은 아닌지. 깨어있는 시민들이 해일이 되어 밀려오고 있다. Sojeong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소니왕조의 몰락과 삼성왕조의 위기. <최소주의행정학> 5(7): 1.

이순신의 지도력과 문재인의 지도력

지난 2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수구기득권세력들은 지금까지도 꿋꿋하게 우한바이러스라고 부르며 정부가 초기에 중국인 입국을 차단하지 못했다며 비난하고 있다. 사실이 어떠하든지 간에 문정권은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염치가 없어야만 한다는 자기최면이자 우격다짐이다.세계 각국에서 문정부가 전염병 대처를 잘 했다며 이른바 “K방역”을 칭찬했다. 빠르고 정확성이 높은 한국산 바이러스진단도구를 구해가려고 안달이다. 잘 축적된 바이러스관련 정보와 방역 경험을 탐내고 있다. 수구세력들은 마지못해 정부가 잘 한 것이 아니라 의료인과 국민이 잘해서 그런 것이라고 둘러댔다. 참으로 고약한 심보다. 그렇다면 방역에 성공하지 못한 나라는 의료인이 형편없고 국민이 못났다는 소리인가?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날숨같은 궤변이다.

“참 대단한 X순신 나셨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입대한 위관장교가 상관인 영관장교의 제안으로 논문을 작성했다. 단기복무를 하는 비전투 병과 장교였다. 그 상관은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지만 무단으로 논문을 군사관련 학술지에 보냈고, 심사절차를 거쳐 출판하게 되었다. 단독저자였고, 상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 흉계를 까맣게 몰랐던 부하장교는 최소한 자신이 공동저자로 올라 있어야 했다며 분개했다. 출판을 기념한 회식자리에서 영관장교는 부하장교의 원망어린 시선과 떨떠름한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그럼, 이순신이 직접 왜적을 다 죽였나?”

명량해전에서 직접 왜적을 죽인 것은 이순신이 아니라 그의 부하들인데, 왜 이순신에게 공이 돌아갔는가에 대한 그의 자문자답이다. 이순신이 망치를 들고 거북선을 만들거나 팔을 걷고 노를 젓지 않았을 것이다. 손수 활과 화살을 만들어 적진에 날리지 않았을 것이다. 직접 칼을 담금질하고 벼림질하여 왜적을 베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순신을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기억할 뿐 그 부하들의 공적을 하나하나 떠올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일을 부당하다고 말하면 안된다. 설교에 가까운 영관장교의 요설에 다들 멍하니 있었다고 한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뒤 얼굴을 찌뿌리며 “참 대단한 X순신 나셨다”라며 혀를 찼다고 한다. 수구기득권 세력의 어거지는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탁월한 무예와 치밀한 작전능력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애민애족과 공명정대에 기반한 지도력이 부하들과 백성들을 감동시켰고 모이게 했고 뭉치게 했다. 개인역량과 무기보다도 사람을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그 지도력이 전쟁에서 승패를 갈랐다고 볼 수 있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 했다. 원균은 똑같은 지위(삼도수군통제사)에서 같은 장비와 군사와 백성들을 동원했지만 처참하게 패했다. 칠천량 해전에서 거북선 세 척 모두와 판옥선 140여 척을 잃었다(이순신은 무너진 몸이었지만 거북선 없이도 남은 판옥선 12척으로 명량해전을 이끌었다). 원균의 무술실력과 군사지식이 턱없이 부족해서였을까? 그가 직접 화살을 쏘거나 칼을 들고 전진에 뛰어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누가 뭐래도 원균은 인력과 장비를 효과적으로 동원하지 못했다. 감히 이순신과 비교할 수 없는 차이다. 그냥 “날로 먹은” 영관장교의 요설이 사람들을 화나게 한 까닭이다.

시민의 좋은 행동을 문정부가 투영했다

코로나19 사태는 아직 진행중이지만 한국의 전염병 방역은 모범사례를 손꼽히고 있다. 정부당국은 과감하고 발빠르게 대처했다. 질병관리본부는 유전자증폭(RT-PCR) 검사법을 개발하여 업계가 진단키트를 양산하도록 했고,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긴급사용을 승인했다.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은 악조건에서도 현장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신천지나 이태원 같은 돌발변수가 있긴 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적극 협력했다. 2009년 신종인플루엔자(H1N1)와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사태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같은 공무원, 같은 의료진, 같은 국민인데, 문재인 정부는 어찌하여 이명박근혜 정권과 이토록 천양지차天壤之差인가?

문정부는 순리를 거스르지 않았다. 촛불혁명과 지난 해 한일 무역분쟁을 거치면서 깨어난 민의에 귀기울였다. 코로나19 현황을 보고하는데 머물지 않고 방송으로 생중계하다시피 했다. 박근혜정권의 청와대가 재난관리 책임을 회피하고 MERS 환자가 발생한 병원을 숨기는데 급급했던 것과는 정반대다. 신속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시민들의 협조를 구했고 시민들은 적극적인 참여로 화답했다. 소정 선생님은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1991: 29)고 했다. SARS 방역에 성공하고 지금의 질병관리본부를 설립한 노무현 정부처럼 문재인 정부도 돈과 집권자가 아니라 사람과 시민이 기준임을 보여주고 있다.

문대통령은 관료제의 기본에 충실하면서 전염병 방역을 독려했다. 청와대가 국가재난으로 인식하고 법에 따라 대처했지만, 위계질서로 찍어눌러 책임을 떠넘기지 않았다. 정치가 아닌 과학 영역인 만큼 의료전문가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문대통령은 박근혜정권에서 부당하게 멍에를 쓴 정은경씨를 일찌감치 질병관리본부장으로 발탁했다. 전문성도 없으면서 감놔라 대추놔라 하는 다른 지도자와는 달리 공식회의에서 그저 본부장의 건강을 걱정하고, 직원들이 맥빠지지 말고 힘내라고 홍삼액을 보냈다. 지금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사태수습을 주관하고 있는 모양새지만, 총리를 포함한 관료들과 지자체장들은 매일매일 정본부장의 입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문대통령은 직접 환자를 치료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자리에서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도록 조정하고 지원하고 격려했다. 정적들의 무차별 공세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정도를 걸었다. 그에게 특별함이 있다면 이성과 원칙에 철저한 상식인이라는 점이다. 달변이 아닌 문대통령과 정본부장에게서 진심과 신뢰가 묻어난다. 트럼프나 아베가 지금 청와대에 없는 것이 천행이고 홍복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이순신의 지도력과 문재인의 지도력. <최소주의행정학> 5(6): 1.

정의당의 패착과 더불어시민당의 진심

제 21대 국회의원선거가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지역구에서만 163석(미래통합당은 84석)을 차지했다. 더불어시민당과 합하면 180석이다. 수구기득권세력이 좌파독재, 경제폭망, 안보파탄이라고 문재인정권을 낙인찍었지만, 메아리가 되지 않은 저주였다. 촛불혁명으로 청와대권력이 교체되었고, 이제는 국회권력도 새롭게 바뀌게 되었다. 20대 국회에서 국민들의 눈과 귀를 괴롭혔던 자들이 대거 사라졌다. 민생당 올드보이들의 마지막 몸부림도 소리없이 허공을 갈랐다. 국민의당 안철수의 생뚱맞은 뜀박질도 머쓱해졌다. 기세등등했던 소위 “태극기부대”의 패거리질도 봄날 아지랑이로 사라졌다. 한마디로 사필귀정이다. 거짓은 참(진심)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다.

정의당의 어리석은 패착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정의당의 성적표다. 정당지지율 9.67%에도 불구하고 고작 6석(지역구 1석)을 얻었다. 욕심이 과해서 스스로 밥그릇을 걷어찼다. 정의당만 생각한다면 그들의 선택에는 잘못이 없다. 정당이라면 독립적으로 자신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공직선거법 개정과정에서 강력한 수구기득권에 맞서기 위해 민주당과 한 배를 탄 상황이었다. 정의당의 패착은 분명했다.

우선 정의당은 선거법 협상과정에서 비례대표 상한선을 20으로 하자는 민주당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주당은 위성정당 출현을 우려했다. 심상정씨는 연동형 비중을 줄이고 캡을 씌워야 한다는 주장을 거대정당의 “후려치기”라고 비판했다. 떡이 크게 보였고 바로 손에 잡힐 듯 느꼈을 것이다. 상한선이 30으로 정해지자 예상대로 위성정당이 출연했고, 선거관리위원회가 무책임하게 속보이는 꼼수를 용납했다. 어처구니없는 이 결정으로 사달이 난 것이다.

두번째 패착은 비례연합정당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개정된 선거법에서 독자적으로 원내교섭단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탓일까? 민주당이 비례대표 순서를 뒤로 하겠다고 양보했지만 끝끝내 참여를 거부하였다. 1할을 전후한 정당지지율을 보면서 침을 삼켰을 것이다. 물론 진보라는 원칙과 이상이 울었을 것이다. 현실과 타협한다는 비굴함을 도저히 참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동은 이상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며 이상이 자리잡을 현실을 고려하는 현실적 이상주의여야 한다(1986: 138). 노회찬이었으면 치열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대의를 위하여 비례연합정당에 참여했을 것이고, 이번 선거에서 당당하게 최소한 10석(33.35%+9.67%를 가정하면)을 손에 쥘 수 있었을 것이다.

열린민주당은 잠깐 인기를 몰았으나 국민의당과 마찬가지로 비례대표 3석(정당지지율 5.42%)에 머물렀다. 정봉주씨와 손혜원씨가 개혁성(선명성)과 확장성을 내세웠지만 결국 자기 살을 깎아먹었다. 민주당과 혹은 진보 지지자들 간의 갈등과 혼동을 초래했고 끝내 유권자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동지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삐지고 흉보는 모습은 곱지 못했다. 의도가 순수했을지라도 순진무구의 자해에 가까운 과격이었다. 열린우리당처럼 마지막 2분을 참지 못하고 밥솥을 불에서 내려놓아 일을 그르친 것이다(1991: 198).

반부패, 반분열, 반과격

소정 선생님께서는 약자의 분열을 늘 경계했다. “나는 이 툭하면 갈가리 찢길 인자를 가진 운동체를 어떻게 하나로 만들까를 고심했다”(2008: 380).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을 빌어 부패하지 말고, 분열하지 말고, 과격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했다(2008: 571). 무서운 상황에서 필요한 최소행동은 비폭력 대응, 동지들 간의 철저한 합의에 의한 운동, 시민과의 호응과 연대라 할 수 있다(1991: 25-26). 공은 동지들에게 돌리고 불리한 것은 자신에게 돌리는 개인윤리를 갖는다(1996: 429). 실패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서로 미워하고 실패의 책임을 동지에게 돌려서는 안된다(2008: 386). 동지 간에 이용관계(잇속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지애가 있다(1996: 621). <이솝우화>에 따르면 약자가 사는 비결은 비폭력과 단결(동지애)이다(1991: 334). 이러한 동지에 대한 관용과 존경이 마음속에서 스며나오기 위해서는 기다림과 참음이 필요하다(2008: 386).

더불어시민당의 진심과 간절함

최배근·우희종 교수가 이끌었던 더불어시민당은 정의당과 열린민주당과는 다른 길을 갔다. 애초부터 촛불혁명이 좌초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시민을 위하여”를 시작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손을 잡으라는 요구다. 사사로움(잇속)을 갖지 않고 대의를 위하여 진보진영의 연대로 촉구하고 판(플랫폼)을 깔아주었다. 두 대표는 선거가 끝나면 미련없이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공언했다. “공개적이고, 비폭력적이고, 운동원들 사이에 합의가 존중되며,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을 만한” 떳떳한 운동을 전개하였다(1996: 620).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했고(청탁이 통하지 않았고), 동지를 해치는 소리를 하지 않았고(남탓하지 않았고), 참여정당의 합의내용에 충실했다. 민주당도 자기 몫을 11번부터 시작함으로써 연동형 선거법의 취지를 살려보려는 의지를 보였다. 선거법에 따라 참여정당의 직접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간판스타도 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전국을 누볐다. 길고 혼동스러운 투표용지에도 불구하고 깨어있는 시민들은 높은 지지율로 화답했다. 소정 선생님께서 제시한 운동 방식에 충실한 결과다.

민주당은 경악스런 선거결과에 두려움을 느낀다며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곱씹었다. 승리에 취하여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 부패와 분열을 경계해야 한다. 인기를 노리는 과격한 언행을 자제해야 한다. 당장은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묵은 개혁과제는 순리에 따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풀어나가야 한다.

월호 아이들이 찾아온 것일까?

경합 중인 민주당 후보들이 막판에 대부분 승리했다. 패색이 짙던 김남국도 막판에 살아왔다. 그냥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처참하게 쓸려간 세월호 아이들이 찾아온 것일까? 하필 오늘이 세월호 참사 6주기 아닌가? 어린 원혼들을 편안히 잠들게 할 때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정의당의 패착과 더불어시민당의 진심. <최소주의행정학> 5(5): 1.

마스크 공급 정책과 “마스크 사회주의”

코로나바이러스가 세상을 휩쓸고 있다. 다가오는 4월 총선거도 전염병 소식에 묻히고 있다. 소위 텔레그램 N번방과 박사방에서 벌어진 (미성년) 성착취 사건도 코로나19 사태를 덮기는 버거워 보인다. 일본에서 열릴 예정이던 올림픽도 아베 정권의 소망과는 달리 연기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한국 정부의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대응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앞다투어 우리나라의 검사도구를 수입하거나 차탄채로 검사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대응이 이렇게 해외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는 반면 국내 언론에게는 무차별 공격을 받고 있다. 친일, 친미, 반공, 반란, 독재에 편들어 기득권을 틀어쥔 수구세력의 발악에 가까운 융단폭격이다. 헌법을 유린하고 민생을 파탄내고 안보를 무너뜨린 좌파독재가 코로나19 사태에 부실하게 대응했다며 대통령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마스크 비판인가? 공연한 트집인가?

지난 1월 20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확진자가 발생했을 때만해도 정부는 마스크보다는 손씻기와 기침 예절을 강조했다. 하지만 상황이 진전되면서 정부의 대응은 달라졌다. 이에 수구세력은 정부가 말바꾸기로 마스크 대란을 자초했다고 비난했다. “갈지자 마스크 정책”이라고 했고, “오락가락”이라 했고, “희망고문”이라고 했다. 1월 29일 식약처에서 KF94나 KF99 마스크가 KF80보다 바람직하다고 했는데, 2월 4일 질병관리본부장이 면마스크는 완전히 보호하는데 제약이 있다고 했고, 2월 6일에는 보건복지부 차관이 전문 마스크는 의료진에게 권장된다(일반인에게는 보건용이나 방한용으로도 감염예방에 충분하다)고 했다. 3월 3일에는 식약처와 질병관리본부에서 보건용 마스크를 재사용해도 되고, 면마스크도 괜찮다고 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3월 6일 깨끗한 환경에서 일하거나 건강한 분들은 마스크를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고 했고, 8일에는 정세균 국무총리가 공직사회가 면마스크를 쓰는데 앞장서겠다고 했다.

과연 어느 대목이 오락가락이란 말인가. 의료진은 등급이 우수한 마스크를 사용하는 것이 낫고 일반인은 면마스크로도 충분하다는 대의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마스크 수급 상황을 고려하여 사회구성원의 불안을 달래고 행동을 조정하기 위한 일상적인 정부의 대처가 아닌가. 언어의 모호성을 빌미로 얼렁뚱땅 비난을 쏟아내는 시비질이다. 차라리 사회불안과 마스크 대란이 일어나길 갈망하는 주술이다. 물론 2월 3일 홍남기 부총리가 보건용 마스크는 매일 8백만 개가 생산되어 수급에 문제없다고 밝혔다가 수요 폭증으로 마스크가 신속하고 충분하게 제공되지 못하자 3월 3일 문대통령이 사과했다. 하지만, 상황이 급변해온 점을 감안하면 이런 정책수정을 말을 바꾸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과하다. 한번 결정한 정책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상황에 맞게 수정되고 더 나은 대안으로 교체될 수 있는 가설임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Wildavsky 2018: xlvii).

“마스크 사회주의”라고라?

정부는 2월 25일 수출비중을 국내생산량의 1할로 제한하고, 5할을 약국, 농협, 우체국을 통해 공급하겠다고 했고, 3월 5일에는 출생연도 끝자리에 따라 날을 정해 9일부터 매주 일인당 마스크 2매를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수구세력은 공적 마스크 5부제를 “마스크 사회주의”라고 낙인찍었다. 공급이 원활하지 않자 생산자가 원하는 대로 판매하지 못하게 하고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구매하지 못하도록 정부가 개입한 것이 문재인표 사회주의란다. 마스크 배급제를 실시하고 마스크 생산량을 늘리는 대만의 정책을 모범사례로 칭찬했던 그들이었다. 배급제를 안한다고 비난하더니, 배급제를 하니까 사회주의라고 욕하는 자들이다. 가격이 비싸든 말든 가진 돈으로 “자유”(사재기)를 누리려는 기득권자들이다. 그들의 억울하고 울화치미는 심통이 저주가 되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무슨 이유를 대서든, 사실관계가 어찌 되었든 간에 문정권은 틀림없이 무능해야 하고 무책임해야만 한다는 자기최면이다.

이제 생활필수품이 된 마스크 수요가 하루 5천만 개이고 생산이 1천만 개라면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시장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생활필수품 시장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우선순위를 잘 따져 불필요한 마스크 수요를 줄여야 하고, 생산과 공급을 격려해야 한다. 하지만 1인당 매일 마스크 1매를 제공하는 것은 희망사항이지 정책목표가 아니다. 실현할 수 없는 일은 애초부터 정책 문제가 될 수 없다. 해답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No solution, no problem”)(Wildavsky 2018: xxxiii). 정책목표는 가용할 수 있는 자원(제약요소)의 범위 내에서 정해야 한다(p. xli). 따라서 정부가 마스크를 1인당 매일 1매씩 제공하지 못한다고 성급하게 비난해서는 안된다. 희망고문이라니… 대체 누가 그런 희망을 가졌단 말인가. 정책비판이 아닌 괜한 트집잡기이자 정치공세일 뿐이다. 하물며 마스크 5부제 자체를 사회주의로 규정하는 것임에랴.

줄서기 이론(queueing theory)에서 보면 선착순으로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언제나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다. 고객의 순서를 정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시장원리대로 지불할 능력(의사)에 따라 서비스나 재화를 제공할 수 있다. 고객들의 기회비용이 현저하게 다르다면 우선 순위를 따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사회의 효용을 최대화시킬 수 있다. 예컨대, 의료진과 보건 담당자에게 먼저 더 많은 마스크를 제공하고, 환자, 노약자 등으로 순서를 정한다. 고객 개개인의 기회비용을 잘 모르고 형평성과 공정성이 가장 중요하다면 추첨을 하거나 일정 절차에 따라 배급하는 것이 좋다. 정부가 제약조건(자원)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의료진과 환자를 우선시하고, 마스크 5부제를 실시하고, 사재기를 경계하고, 생산을 독려한 것은 적절한 조치다. 정치 이념이나 종교와 관계없는 과학과 경제학이다. 상식에 가깝다.

참고문헌

  • Wildavsky, Aaron. 2018. The Art and Craft of Policy Analysis. Palgrave MacMil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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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하기: 박헌명. 2020. 마스크 공급 정책과 “마스크 사회주의.” <최소주의행정학> 5(4): 1.

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이 지구촌 이곳 저곳에서 산불처럼 번지고 있다. 1월 초 중국에서 바이러스성 폐렴으로 알려진 뒤 한국, 일본, 이란, 이탤리를 넘어서 유럽과 미국을 강타하고 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3월 17일 현재 확진자는 중국이 8만명(사망자 3,226명), 이탤리가 2만 8천명(사망자 2,158명), 이란이 1만 5천명(사망자 853명), 스페인이 9천명(사망자 309명), 한국이 8천명(사망자 75명), 미국이 4천명(사망자 78명)이다. 이탤리, 이란, 스페인, 미국의 상승세가 무섭다.

처음에는 남의 나라 얘긴 줄 알았지만 1월 20일 국내에서도 감염자가 확인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엉겁결에 재난 영화 속으로 떠밀려 들어온 것같은 황당함과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피부에 확 와닿는 두려움에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사람들은 집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려하면서 감옥같은 하루하루를 근근히 버티고 있다. 특히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은 점점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회사는 직원들을 집에서 근무하도록 했고, 가게와 식당은 사실상 문을 닫았고, 학교와 유치원은 개학을 연기하고 있다. 승객이 줄면서 버스가 멈추었고, 지하철과 택시도 한산해졌다.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하늘길도 뱃길도 닫혔다. 세계대전이라도 터진 듯 “코로나 전선”은 점점 타오르다가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고 있다. 국경을 걸어 잠그고 금융시장을 뒤흔들고 사람들의 일상을 집어삼키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전문성, 투명성, 창의성

한국 정부는 다른 어느 정부보다도 신속하고 과감하고 공격적으로 신종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관리해왔다. 전문가집단인 질병관리본부(중앙방역대책본부)를 중심으로 감염자를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감염경로를 파악해왔다. 대통령이 정은경 본부장의 건강을 걱정하고 국무총리가 행정지원을 이끄는 모습은 낯설다. 박근혜 정권에서 질병예방센터장이었던 정본부장은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사태 수습에 책임을 지고(권한을 쥐고 있던 장관과 고위 공무원 대신) 징계를 받았다. 당시 질병관리본부를 떠났던 다른 공무원과는 달리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던 그녀의 전문성과 성실함을 인사권자가 놓치지 않았으리라. 비록 상황이 많이 진전되어 현재 국가차원에서 재난을 관리하고 있지만 질병관리본부의 역할은 여전하다. 아직도 일부 교회 등에서 “영빨”을 믿고 기도 모임을 지속하거나 정파성에 매몰되어 무책임한 비난과 저주를 쏟아내고 있으나, 정부는 전문성과 과학에 근거하여 냉철하게 재난에 대처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는 매일 신종바이러스 현황을 발표하고, 방송을 통해 확진자와 사망자 통계를 시시각각 내보내고 있다. 두 달 넘게 매일 전염병 소식을 생방송(뉴스특보)으로 전하고 있다. 이러한 투명성은 재난 상황에서 기승氣勝을 떨치는 유언비어를 차단하였다. 문재인 정부가 마스크 300만장을 중국에 보냈다거나, 북한에 몰래 마스크를 보내서 마스크 대란을 자초했다거나, 마스크 유통업체 대표가 영부인의 동창이어서 특혜를 받았다는 등의 날조기사가 등장했지만 약발이 오래가지 못했다. 보건용 마스크 공급에 관련된 과도한 비난과 선동(예컨대, “마스크 사회주의”)도 힘을 쓰지 못했다. 또한 사생활 침해라는 우려도 있지만 신용카드, 교통카드, CCTV 정보 등을 통한 확진자의 동선을 제공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에서 자체 개발한 실시간 유전자 증폭 검사법(RT-PCR)은 바이러스감염 판별에 걸리는 시간을 하루에서 6시간으로 단축시켰다. 하루에 1만명을 검사하던 역량이 요즘에는 2만명까지 늘어난 까닭이다. 물론 의료관계자의 열정과 헌신이 이뤄낸 기적이기도 하다. 최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우리나라의 진단도구를 받아가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또한 “차탄채로”(drive-through) 검사하는 방식은 환자가 머문 방을 소독할 시간을 벌고 환자간 감염을 막을 수 있는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운영법이다. 국내외의 호평을 받은 이 방식은 최근 미국에 역수출되었고(미국식 차탄채로 주문법이 한국식 진단법으로 진화되어), 영국과 독일을 비롯하여 반한정서가 불고 있는 일본에서도 도입되었다. 도시와 하늘길과 국경을 폐쇄하지 않고서도, 자국민은 물론이려니와 불법체류자들까지, 전국에서 사실상 무료로 감염여부를 빠르게 검사해주고 있다. 한국의 대응에 세계가 찬사를 보내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닮아가는 아베 정권

반면 일본의 상황은 한국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아베 정권은 매우 정치적이고 느리고 소극적이고 방어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전문의료진이 아닌 정치권이 사태 수습을 주도하고 있고, 정부 대응이 투명하지 않다. 현재 일본에서 824명이 감염이 되었고 24명이 사망하였다고 발표되었지만, 그 숫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요코하마항에 정박중인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에서 발생한 환자를 방치하였다가 700명이 넘게 감염되었고, 그 숫자를 통계치에서 빼려는 꼼수를 부렸고, 하선한 승객을 격리조치하지 않고 집으로 보냈다. 어떻게든 일단 감염자 수를 줄여보려는 아베 정권의 의도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국 언론과는 달리 일본 언론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덮는 듯 무뎌진 날을 내리고 지나칠 정도로 평온하다.

일본 정부는 여행을 자제하고 만일 감염이 의심되면 집밖으로 나가지 말고, 고열이 며칠 지속되면 전화하라고 권하고 있다. 좀 박하게 말하자면 각자 알아서 조심하고, 재수없이 감염되면 집에 칩거하다가 응급실에 실려가라는 것이다. 비용은 둘째 치고 검사를 받고 싶다고 해서 언제 어디서나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시민들은 답답할 뿐이다. 정부 불신과 불안이 휴지까지 사재기한다.

이러한 아베 정권의 대응은 지난 2014년 일어난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 박근혜를 지키려고 이리저리 틀어막고 꼼수를 부리다가 탈이 난 것이다. 올림픽을 개최하고 헌법을 뒤바꾸려는 욕심이 과하여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내팽개치고 있다. 수구군국주의자들의 시대착오적 정신줄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막는 국면으로 몰고가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재난 앞에서 정부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반추하게 되는 춘삼월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 <최소주의행정학> 5(3): 1.

차악을 긍휼하고 지켜야 미래가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1월 28일 자 <경향신문>의 정동칼럼에 게재된 “민주당만 빼고”를 지난 달 13일 공직선거법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두어 주 전에 발행된 사설私說에 늦은 시비를 거는 것이 우습다. 쓸데없는 짓이다. 공당에서 언론사와 기고자를 고발하는 것도, 반발이 일자 고발을 취소하고 사과하느라 허둥대는 모습도 곱게 보이지 않는다. 하물며 지금껏 문학과 사상과 예술을 억압했던 자들이 이제와서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며 민주당을 비난하는 일임에랴. 언론중재위원회가 12일 해당 私說을 공직선거법 8조(언론기관의 공정보도의무)를 위반했다고 결론냈지만, 이 소동을 법위반과 정쟁으로 보는 시각이 불편하다.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

일부러 날을 잡아 “민주당만 빼고”를 정독한 느낌은 한마디로 자괴감이다. 아무리 연구교수라지만 어설픈 “아줌마 논법”에 수구신문의 글쓰기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인지…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 “선거는 무용하고 정치는 해악”인 상황에서 왜 “민주당만 빼고” 찍으라는 것인지… 멀쩡한 신문사에서 음식으로 치면 맛을 논할 수준도 안되는 먹을거리를 상에 올린 까닭은 대체 무엇인지… 소위 “기레기”로 표현되는 언론인의 수준 그대로는 아닌지. 공직선거법을 어겼는지 표현할 자유를 침해했는지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 글쓰기와 신문사의 기본과 상식에 관한 문제다.

왜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지만 나는 “선거 과정의 달콤한 공약이 선거 뒤에 배신으로 돌아오는 일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 배신에는 국민도 책임이 있다.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최악을 피하고자 계속해서 차악에 표를 줬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최악이나 차악이나 나쁜 것은 매한가지여서 어차피 선거가 끝나면 상전노릇을 할테니 차악을 편드는 것이 부질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도 결론은 선거도 정치도 없애야 한다(혁명을 해서라도 판을 뒤집자)가 아니라 뜬금없이 여당을 찍지 말라니… 최선이 있는데도 어리석은 국민이 매번 차악을 선택했다가 배신을 당했다는 말인가? 대체 언제 어디에 최선(틀림없이 모든 공약을 그대로 집행하는 정당)이 존재했단 말인가? 순진무구한 노녀老女의 두서없는 푸념이자 무책임한 망발이다.

그런데 정말 최악을 피하고자 차악을 선택한 것이 잘못일까? 2월 16일 SBS의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 출연한 글쓴이는 수구세력에게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 민주당에게 비판한 것이라고 했다. 그나마 싹수라도 보이는 자들에게 쓴소리를 한다는 나름의 합리성이자 아량일 터이다. 하지만 강자(기득권자)의 폭력에 시달리는 약자에게 너도 잘한 것이 없다며 죽도록 발길질을 해대는 어리석음이다. 강자의 포악함에는 으레 그러려니 눈과 귀를 닫은 채 약자의 잘못만 야박하게 따지고 난도질하는 자들이다. 최악을 치죄治罪하지도 않으면서 강자의 편에 서서 차악을 훈계하는 짓이다. 자신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모세를 원망한 못난 군중의 정신줄이다. 그래서 바보 노무현을 잃은 것이다.

인간에게 차라리 차악이 최선이다

소정 선생님(1986: 140)은 “물론 못난 야당이 어진 야당만은 못하다. 그러나 야당이 여당에게 맞아 죽는 것보다는 신통치 않더라도 야당이 살아 남아 주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라고 적었다. “부정을 하는 구성원이 있는 [구조적으로 선한] 야당이 부정을 안하는 구성원이 있는 포악한 [구조적으로 악한] 여당보다 낫다”(1991: 308). 신이 이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요셉을, 윤리적으로 나쁘지만 구조적으로 힘없는 약자의 자리에 있는 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1991: 307). 요셉은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지만, 형(카인)에게 맞아죽은 아벨과는 달리 살아남아 최소한도의 회개라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던 형들을 용서할만큼 정직하고 성실한 요셉을 낳을 수 있었다. 한 단계 진전이다.

소정 선생님(1991: 306)은 “신이 최대의 개인윤리를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은 점이 멋이 있다. 신은 이상적 현실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적 이상주의자이다”라고 풀어냈다. 최소한의 변화(회개)라도 있어야 다음에 좀더 나은 권력의 견제자가 등장하며, 비로소 민주주의가 가능해진다(1986: 140-141). 그러니까 지금 당장 최선이 아니라고 해서 최악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어쩌면 인간에게 최선은 이룰 수 없는 꿈일 뿐이다. 계속 타락하는 쪽으로 가지 않는다면 반성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또 후회하면서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차악이 차라리 최선이다. 그러니 최소한이라도 악행을 돌아보고 말귀라도 알아들으려는 차악이 얼마나 귀한가. 어쨋든 그 미약한 시작이 없다면 어찌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인내심을 가지고 차악의 성장을 지켜보라

민주당이 여당이니까 구조적으로 악하다는 것은 착각이다. 여전히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는 민주당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던 수구세력이다. 애초부터 친일부역세력과 친미반공세력을 등에 업고 지금껏 해먹고 있는 구조악이다. 천우신조天佑神助로 민주당이 집권하긴 했지만 여전히 민주세력은 위태롭고 아쉽다. 적폐청산도 개혁도 시원스럽지 못하고 더디기만 하다. 수구세력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패악질과 “침대축구”로 버티는 한 무던히 참고 견디고 기다려야 한다. 세월호 7시간을 양보해서라도 탄핵을 취해야 했다. 누더기질로 복잡한 셈법이 되었다 해도, 가짜정당으로 무력화되었다 해도 선거법을 바꿔야 했다.

수구세력의 파상공세와 수많은 악재에도 불구하고 집권당의 지지도는 견고하다. 민주당이 잘해서라기보다는 백성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시늉이라도 하기 때문이다. 굼뜨지만 야곱(열린우리당)에서 요셉으로 성장해가는 변화를 보여준다. 하늘(백성)은 어리석지 않다. “민주당만 빼고”야말로 이상에 집착하여 이성을 잃은 자들의 횡설수설이자 “죽쒀서 개주는 짓”이다. 당장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어린 새싹을 닦달하고 뿌리채 뽑아버려서야 어디…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차악을 긍휼하고 지켜야 미래가 있다. <최소주의행정학> 5(2): 1.

행정을 모르는 행정학의 수치와 시련

지난 여름 오랜 만에 원주에 다녀왔다. 25년 전 군복무를 시작한 곳이어서 인상이 깊게 남아있다. 몇년 전에는 원주에서 횡성으로 가는 길을 따라 차를 몰아보았다. 출퇴근 버스를 타고 묵계리에서 전투비행단을 거쳐 원주로 내달리던 길이었다. 하지만 주변이 워낙 몰라보게 바뀌어서 오랜 추억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원주에 가서 추억을 잃다

이번에는 옛날처럼 시외버스를 타고 가서 외곽으로 옮긴 터미널에 내렸다. 원주역에서 시작되는 A도로와 B도로를 직접 걸어보았다. 지금은 각각 원일로와 평원로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젊은이들로 북적이던 원주기독병원 앞 길모퉁이에 들어서니 당시 워크맨으로 즐겨듣던 김태영의 “피카소에게”가 들리는 듯했다. 불이 났다던 중앙시장은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시원한 배를 고명으로 얹어주던 남경막국수집과 밥그릇을 요란스레 두드리며 돼지삼겹살을 볶아주던 식당은 찾을 길이 없었다. 생전 처음 서울역에 내린 촌놈처럼 이리저리 기웃거렸지만 낯설기만 한 풍경에 발걸음을 돌렸다. 세파에 밀려 기어이 어딘가로 옮겨갔으리… 눈과 코와 귀가 기억하는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이다.

행정을 모르는 행정학?

같은 시절 대학원을 다녔던 분과 점심을 같이 했다. 몇년 만에 낯선 동네에서 회포를 나누었다. 혁신도시에 공공기관이 자리잡은 이야기, 죄다 논밭이던 황골이 카페촌으로 환골탈태한 이야기, 공부하던 친구들이 사는 이야기, 애들 키우는 이야기를 하다가 어쩔 수 없이 행정학 이야기로 접어들었다. 연구원에서 오래 근무하고 있는 분이어서 요즘 무엇이 학계의 관심사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분위기가 어떤지 귀동냥이라도 할까 싶었다.

내가 받은 첫번째 인상은 열성을 가지고 매진하는 학자들이나 연구원들이 드물다는 것이다. 현실 속의 행정문제를 치열하게 논의하고 의미있는 규칙성을 찾아내는 본업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 주어진 연구과제를 때맞추어 “밀어내기”에도 버거운 상황이다. 얼마나 현실과 이론에 부합하는지를 따져볼 겨를도 없다. 주어진 시간 안에 수치로 표현된 성과목표를 달성해야 살아남는 판이다. 질보다는 양이라 했던가. 이른바 잘 팔리는 주제로 논문이나 연구과제를 많이 생산해 내는 자가 장땡이다. 한가롭게 이론을 따지고 방법론을 따지고 의미를 되새기는 자들은 진화를 거부한 종이다. 아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낙오자이다.

두번째 인상은 행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공직사회와 공직자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 연구원에서 지방정부를 포함한 공공기관의 정보를 조사하여 축적하고 있지만 막상 쓸만한 정보는 거의 없다. 숫자로 적힌 통계치를 가지고 있기는 하나 대개는 수박겉핥는 정보일 뿐이다. 공공기관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다가 마지 못해 생색만 낸 측면도 있다. 하지만 행정학자가 어떤 정보가 어떤 형태로 어디에 있는지, 어떤 정보가 유용한지,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두리뭉실하게 자료를 달라는 경우가 더 많다. 행정학자라지만 관료들이 현장에서 실제 일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책과 논문의 언어로 말하고, 관료들은 행정 현실의 언어로 말한다. 몇년 전 고위 공무원과 대화를 나누면서 느꼈던 괴리감이다. 그 간극이 커지면 서로 의미있는 대화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알맹이는 없고 변죽이나 울리고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관료들이 행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쓸만한 정보를 줄 까닭이 없다. 어차피 제대로 이해하지도 사용하지도 못할 위인들 아닌가? 후원이나 연구과제나 따내기 위해 굽실거리는 학자의 자존심이라니.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는 행정학

지난 해 만난 어느 선배는 한국에서 행정학이 독립학문으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렸다고 진단했다. 대형서점에서 행정학 서각이 점점 줄어들었고, 이제는 아예 사라졌다고 했다. 대신 행정학 책은 정치학이나 법학 책시렁에 곁다리로 꽂혀있다고 했다. 아님 공무원 수험서 서가에서나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정체성 위기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를 들를 때마다 행정학 서각이 거의 그대로인 것이 의아스러웠지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몇년 전 어느 행정학자가 한국 대학의 행정학과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며 우려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행정학은 행정고시에나 필요한 한 과목 쯤으로 치부되고 있는 느낌이다. 여전히 행정학의 정체성과 유용성을 따지고 행정학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30년 전에 비해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행정학과 수와 학생 수가 줄어든 만큼 심각해졌다. 아니 행정고시에서 차지하고 있는 행정학의 존재감에 정확히 비례한 학과의 위상이라 말해야 하나. 고시로 흥했으니 고시로 망하게 되는가… 행정고시에 기대어 도끼자루 썩는 줄을 알면서도 안일했던 업보業報다. 화려하게 껍데기를 치장하는데 열을 올리면서도 정작 학문의 기반을 다지고 쓸모를 넓히는데 게을렀던 업과業果다. 이젠 잘 팔리지 않는 행정학 교과서보다는 방법론같은 실용서적을 출간하는 것이 낫다는 권고를 나는 자괴감으로 들었다.

행정문제에 답을 주는 행정학이 되어야

과거에 비하면 행정학 논문이 질과 양에서 많이 향상되었다. 외부의 지원을 받는 연구과제도 많이 늘었다. 하지만 수치로 표시된 행정학 성과물이 얼마나 행정현실에서 쓸모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행정현실을 이해하고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한낱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행정학이 무엇을 공부하는 것인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기업과 함께 경영문제를 풀어감으로써 존재감을 키우고 있는 경영학에서 배워야 한다. 고시와 학위를 위한 행정학이 아니라 실제 정부의 일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행정학이 되어야 한다. 선문답같은 훈수질이 아니라 행정문제를 진단하고 현실적인 답을 주는 행정학이어야 한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행정을 모르는 행정학의 수치와 시련. <최소주의행정학> 5(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