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로 가는 길

이순신의 지도력과 문재인의 지도력

지난 2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수구기득권세력들은 지금까지도 꿋꿋하게 우한바이러스라고 부르며 정부가 초기에 중국인 입국을 차단하지 못했다며 비난하고 있다. 사실이 어떠하든지 간에 문정권은 무능하고 무책임하고 염치가 없어야만 한다는 자기최면이자 우격다짐이다.세계 각국에서 문정부가 전염병 대처를 잘 했다며 이른바 “K방역”을 칭찬했다. 빠르고 정확성이 높은 한국산 바이러스진단도구를 구해가려고 안달이다. 잘 축적된 바이러스관련 정보와 방역 경험을 탐내고 있다. 수구세력들은 마지못해 정부가 잘 한 것이 아니라 의료인과 국민이 잘해서 그런 것이라고 둘러댔다. 참으로 고약한 심보다. 그렇다면 방역에 성공하지 못한 나라는 의료인이 형편없고 국민이 못났다는 소리인가? 죽어가는 자의 마지막 날숨같은 궤변이다.

“참 대단한 X순신 나셨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입대한 위관장교가 상관인 영관장교의 제안으로 논문을 작성했다. 단기복무를 하는 비전투 병과 장교였다. 그 상관은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지만 무단으로 논문을 군사관련 학술지에 보냈고, 심사절차를 거쳐 출판하게 되었다. 단독저자였고, 상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 흉계를 까맣게 몰랐던 부하장교는 최소한 자신이 공동저자로 올라 있어야 했다며 분개했다. 출판을 기념한 회식자리에서 영관장교는 부하장교의 원망어린 시선과 떨떠름한 분위기를 의식했는지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그럼, 이순신이 직접 왜적을 다 죽였나?”

명량해전에서 직접 왜적을 죽인 것은 이순신이 아니라 그의 부하들인데, 왜 이순신에게 공이 돌아갔는가에 대한 그의 자문자답이다. 이순신이 망치를 들고 거북선을 만들거나 팔을 걷고 노를 젓지 않았을 것이다. 손수 활과 화살을 만들어 적진에 날리지 않았을 것이다. 직접 칼을 담금질하고 벼림질하여 왜적을 베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순신을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기억할 뿐 그 부하들의 공적을 하나하나 떠올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일을 부당하다고 말하면 안된다. 설교에 가까운 영관장교의 요설에 다들 멍하니 있었다고 한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한 뒤 얼굴을 찌뿌리며 “참 대단한 X순신 나셨다”라며 혀를 찼다고 한다. 수구기득권 세력의 어거지는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탁월한 무예와 치밀한 작전능력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애민애족과 공명정대에 기반한 지도력이 부하들과 백성들을 감동시켰고 모이게 했고 뭉치게 했다. 개인역량과 무기보다도 사람을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그 지도력이 전쟁에서 승패를 갈랐다고 볼 수 있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 했다. 원균은 똑같은 지위(삼도수군통제사)에서 같은 장비와 군사와 백성들을 동원했지만 처참하게 패했다. 칠천량 해전에서 거북선 세 척 모두와 판옥선 140여 척을 잃었다(이순신은 무너진 몸이었지만 거북선 없이도 남은 판옥선 12척으로 명량해전을 이끌었다). 원균의 무술실력과 군사지식이 턱없이 부족해서였을까? 그가 직접 화살을 쏘거나 칼을 들고 전진에 뛰어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누가 뭐래도 원균은 인력과 장비를 효과적으로 동원하지 못했다. 감히 이순신과 비교할 수 없는 차이다. 그냥 “날로 먹은” 영관장교의 요설이 사람들을 화나게 한 까닭이다.

시민의 좋은 행동을 문정부가 투영했다

코로나19 사태는 아직 진행중이지만 한국의 전염병 방역은 모범사례를 손꼽히고 있다. 정부당국은 과감하고 발빠르게 대처했다. 질병관리본부는 유전자증폭(RT-PCR) 검사법을 개발하여 업계가 진단키트를 양산하도록 했고,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긴급사용을 승인했다.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은 악조건에서도 현장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신천지나 이태원 같은 돌발변수가 있긴 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적극 협력했다. 2009년 신종인플루엔자(H1N1)와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사태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같은 공무원, 같은 의료진, 같은 국민인데, 문재인 정부는 어찌하여 이명박근혜 정권과 이토록 천양지차天壤之差인가?

문정부는 순리를 거스르지 않았다. 촛불혁명과 지난 해 한일 무역분쟁을 거치면서 깨어난 민의에 귀기울였다. 코로나19 현황을 보고하는데 머물지 않고 방송으로 생중계하다시피 했다. 박근혜정권의 청와대가 재난관리 책임을 회피하고 MERS 환자가 발생한 병원을 숨기는데 급급했던 것과는 정반대다. 신속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면서 시민들의 협조를 구했고 시민들은 적극적인 참여로 화답했다. 소정 선생님은 “民의 좋은 행동을 官이 배우며 官의 나쁜 행동을 民이 배운다”(1991: 29)고 했다. SARS 방역에 성공하고 지금의 질병관리본부를 설립한 노무현 정부처럼 문재인 정부도 돈과 집권자가 아니라 사람과 시민이 기준임을 보여주고 있다.

문대통령은 관료제의 기본에 충실하면서 전염병 방역을 독려했다. 청와대가 국가재난으로 인식하고 법에 따라 대처했지만, 위계질서로 찍어눌러 책임을 떠넘기지 않았다. 정치가 아닌 과학 영역인 만큼 의료전문가들의 의견을 존중하여 그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 문대통령은 박근혜정권에서 부당하게 멍에를 쓴 정은경씨를 일찌감치 질병관리본부장으로 발탁했다. 전문성도 없으면서 감놔라 대추놔라 하는 다른 지도자와는 달리 공식회의에서 그저 본부장의 건강을 걱정하고, 직원들이 맥빠지지 말고 힘내라고 홍삼액을 보냈다. 지금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사태수습을 주관하고 있는 모양새지만, 총리를 포함한 관료들과 지자체장들은 매일매일 정본부장의 입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문대통령은 직접 환자를 치료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자리에서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도록 조정하고 지원하고 격려했다. 정적들의 무차별 공세에도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정도를 걸었다. 그에게 특별함이 있다면 이성과 원칙에 철저한 상식인이라는 점이다. 달변이 아닌 문대통령과 정본부장에게서 진심과 신뢰가 묻어난다. 트럼프나 아베가 지금 청와대에 없는 것이 천행이고 홍복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이순신의 지도력과 문재인의 지도력. <최소주의행정학> 5(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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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로 가는 길

정의당의 패착과 더불어시민당의 진심

제 21대 국회의원선거가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지역구에서만 163석(미래통합당은 84석)을 차지했다. 더불어시민당과 합하면 180석이다. 수구기득권세력이 좌파독재, 경제폭망, 안보파탄이라고 문재인정권을 낙인찍었지만, 메아리가 되지 않은 저주였다. 촛불혁명으로 청와대권력이 교체되었고, 이제는 국회권력도 새롭게 바뀌게 되었다. 20대 국회에서 국민들의 눈과 귀를 괴롭혔던 자들이 대거 사라졌다. 민생당 올드보이들의 마지막 몸부림도 소리없이 허공을 갈랐다. 국민의당 안철수의 생뚱맞은 뜀박질도 머쓱해졌다. 기세등등했던 소위 “태극기부대”의 패거리질도 봄날 아지랑이로 사라졌다. 한마디로 사필귀정이다. 거짓은 참(진심)을 이길 수 없는 법이다.

정의당의 어리석은 패착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정의당의 성적표다. 정당지지율 9.67%에도 불구하고 고작 6석(지역구 1석)을 얻었다. 욕심이 과해서 스스로 밥그릇을 걷어찼다. 정의당만 생각한다면 그들의 선택에는 잘못이 없다. 정당이라면 독립적으로 자신의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공직선거법 개정과정에서 강력한 수구기득권에 맞서기 위해 민주당과 한 배를 탄 상황이었다. 정의당의 패착은 분명했다.

우선 정의당은 선거법 협상과정에서 비례대표 상한선을 20으로 하자는 민주당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주당은 위성정당 출현을 우려했다. 심상정씨는 연동형 비중을 줄이고 캡을 씌워야 한다는 주장을 거대정당의 “후려치기”라고 비판했다. 떡이 크게 보였고 바로 손에 잡힐 듯 느꼈을 것이다. 상한선이 30으로 정해지자 예상대로 위성정당이 출연했고, 선거관리위원회가 무책임하게 속보이는 꼼수를 용납했다. 어처구니없는 이 결정으로 사달이 난 것이다.

두번째 패착은 비례연합정당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개정된 선거법에서 독자적으로 원내교섭단체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 탓일까? 민주당이 비례대표 순서를 뒤로 하겠다고 양보했지만 끝끝내 참여를 거부하였다. 1할을 전후한 정당지지율을 보면서 침을 삼켰을 것이다. 물론 진보라는 원칙과 이상이 울었을 것이다. 현실과 타협한다는 비굴함을 도저히 참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운동은 이상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며 이상이 자리잡을 현실을 고려하는 현실적 이상주의여야 한다(1986: 138). 노회찬이었으면 치열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대의를 위하여 비례연합정당에 참여했을 것이고, 이번 선거에서 당당하게 최소한 10석(33.35%+9.67%를 가정하면)을 손에 쥘 수 있었을 것이다.

열린민주당은 잠깐 인기를 몰았으나 국민의당과 마찬가지로 비례대표 3석(정당지지율 5.42%)에 머물렀다. 정봉주씨와 손혜원씨가 개혁성(선명성)과 확장성을 내세웠지만 결국 자기 살을 깎아먹었다. 민주당과 혹은 진보 지지자들 간의 갈등과 혼동을 초래했고 끝내 유권자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동지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삐지고 흉보는 모습은 곱지 못했다. 의도가 순수했을지라도 순진무구의 자해에 가까운 과격이었다. 열린우리당처럼 마지막 2분을 참지 못하고 밥솥을 불에서 내려놓아 일을 그르친 것이다(1991: 198).

반부패, 반분열, 반과격

소정 선생님께서는 약자의 분열을 늘 경계했다. “나는 이 툭하면 갈가리 찢길 인자를 가진 운동체를 어떻게 하나로 만들까를 고심했다”(2008: 380).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을 빌어 부패하지 말고, 분열하지 말고, 과격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했다(2008: 571). 무서운 상황에서 필요한 최소행동은 비폭력 대응, 동지들 간의 철저한 합의에 의한 운동, 시민과의 호응과 연대라 할 수 있다(1991: 25-26). 공은 동지들에게 돌리고 불리한 것은 자신에게 돌리는 개인윤리를 갖는다(1996: 429). 실패한 집단의 구성원들이 서로 미워하고 실패의 책임을 동지에게 돌려서는 안된다(2008: 386). 동지 간에 이용관계(잇속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지애가 있다(1996: 621). <이솝우화>에 따르면 약자가 사는 비결은 비폭력과 단결(동지애)이다(1991: 334). 이러한 동지에 대한 관용과 존경이 마음속에서 스며나오기 위해서는 기다림과 참음이 필요하다(2008: 386).

더불어시민당의 진심과 간절함

최배근·우희종 교수가 이끌었던 더불어시민당은 정의당과 열린민주당과는 다른 길을 갔다. 애초부터 촛불혁명이 좌초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 “시민을 위하여”를 시작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손을 잡으라는 요구다. 사사로움(잇속)을 갖지 않고 대의를 위하여 진보진영의 연대로 촉구하고 판(플랫폼)을 깔아주었다. 두 대표는 선거가 끝나면 미련없이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공언했다. “공개적이고, 비폭력적이고, 운동원들 사이에 합의가 존중되며,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을 만한” 떳떳한 운동을 전개하였다(1996: 620). 모든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했고(청탁이 통하지 않았고), 동지를 해치는 소리를 하지 않았고(남탓하지 않았고), 참여정당의 합의내용에 충실했다. 민주당도 자기 몫을 11번부터 시작함으로써 연동형 선거법의 취지를 살려보려는 의지를 보였다. 선거법에 따라 참여정당의 직접 지원을 받지 못했지만, 간판스타도 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전국을 누볐다. 길고 혼동스러운 투표용지에도 불구하고 깨어있는 시민들은 높은 지지율로 화답했다. 소정 선생님께서 제시한 운동 방식에 충실한 결과다.

민주당은 경악스런 선거결과에 두려움을 느낀다며 열린우리당의 실패를 곱씹었다. 승리에 취하여 경거망동하지 말아야 한다. 부패와 분열을 경계해야 한다. 인기를 노리는 과격한 언행을 자제해야 한다. 당장은 코로나19 사태를 극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묵은 개혁과제는 순리에 따라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풀어나가야 한다.

월호 아이들이 찾아온 것일까?

경합 중인 민주당 후보들이 막판에 대부분 승리했다. 패색이 짙던 김남국도 막판에 살아왔다. 그냥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 처참하게 쓸려간 세월호 아이들이 찾아온 것일까? 하필 오늘이 세월호 참사 6주기 아닌가? 어린 원혼들을 편안히 잠들게 할 때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정의당의 패착과 더불어시민당의 진심. <최소주의행정학> 5(5): 1.

기본
반민주주의 증상

마스크 공급 정책과 “마스크 사회주의”

코로나바이러스가 세상을 휩쓸고 있다. 다가오는 4월 총선거도 전염병 소식에 묻히고 있다. 소위 텔레그램 N번방과 박사방에서 벌어진 (미성년) 성착취 사건도 코로나19 사태를 덮기는 버거워 보인다. 일본에서 열릴 예정이던 올림픽도 아베 정권의 소망과는 달리 연기되었다.

세계 각국에서 한국 정부의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대응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앞다투어 우리나라의 검사도구를 수입하거나 차탄채로 검사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대응이 이렇게 해외 언론으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는 반면 국내 언론에게는 무차별 공격을 받고 있다. 친일, 친미, 반공, 반란, 독재에 편들어 기득권을 틀어쥔 수구세력의 발악에 가까운 융단폭격이다. 헌법을 유린하고 민생을 파탄내고 안보를 무너뜨린 좌파독재가 코로나19 사태에 부실하게 대응했다며 대통령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마스크 비판인가? 공연한 트집인가?

지난 1월 20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확진자가 발생했을 때만해도 정부는 마스크보다는 손씻기와 기침 예절을 강조했다. 하지만 상황이 진전되면서 정부의 대응은 달라졌다. 이에 수구세력은 정부가 말바꾸기로 마스크 대란을 자초했다고 비난했다. “갈지자 마스크 정책”이라고 했고, “오락가락”이라 했고, “희망고문”이라고 했다. 1월 29일 식약처에서 KF94나 KF99 마스크가 KF80보다 바람직하다고 했는데, 2월 4일 질병관리본부장이 면마스크는 완전히 보호하는데 제약이 있다고 했고, 2월 6일에는 보건복지부 차관이 전문 마스크는 의료진에게 권장된다(일반인에게는 보건용이나 방한용으로도 감염예방에 충분하다)고 했다. 3월 3일에는 식약처와 질병관리본부에서 보건용 마스크를 재사용해도 되고, 면마스크도 괜찮다고 했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3월 6일 깨끗한 환경에서 일하거나 건강한 분들은 마스크를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고 했고, 8일에는 정세균 국무총리가 공직사회가 면마스크를 쓰는데 앞장서겠다고 했다.

과연 어느 대목이 오락가락이란 말인가. 의료진은 등급이 우수한 마스크를 사용하는 것이 낫고 일반인은 면마스크로도 충분하다는 대의에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마스크 수급 상황을 고려하여 사회구성원의 불안을 달래고 행동을 조정하기 위한 일상적인 정부의 대처가 아닌가. 언어의 모호성을 빌미로 얼렁뚱땅 비난을 쏟아내는 시비질이다. 차라리 사회불안과 마스크 대란이 일어나길 갈망하는 주술이다. 물론 2월 3일 홍남기 부총리가 보건용 마스크는 매일 8백만 개가 생산되어 수급에 문제없다고 밝혔다가 수요 폭증으로 마스크가 신속하고 충분하게 제공되지 못하자 3월 3일 문대통령이 사과했다. 하지만, 상황이 급변해온 점을 감안하면 이런 정책수정을 말을 바꾸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과하다. 한번 결정한 정책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라 상황에 맞게 수정되고 더 나은 대안으로 교체될 수 있는 가설임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Wildavsky 2018: xlvii).

“마스크 사회주의”라고라?

정부는 2월 25일 수출비중을 국내생산량의 1할로 제한하고, 5할을 약국, 농협, 우체국을 통해 공급하겠다고 했고, 3월 5일에는 출생연도 끝자리에 따라 날을 정해 9일부터 매주 일인당 마스크 2매를 공급하겠다고 발표했다. 수구세력은 공적 마스크 5부제를 “마스크 사회주의”라고 낙인찍었다. 공급이 원활하지 않자 생산자가 원하는 대로 판매하지 못하게 하고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구매하지 못하도록 정부가 개입한 것이 문재인표 사회주의란다. 마스크 배급제를 실시하고 마스크 생산량을 늘리는 대만의 정책을 모범사례로 칭찬했던 그들이었다. 배급제를 안한다고 비난하더니, 배급제를 하니까 사회주의라고 욕하는 자들이다. 가격이 비싸든 말든 가진 돈으로 “자유”(사재기)를 누리려는 기득권자들이다. 그들의 억울하고 울화치미는 심통이 저주가 되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무슨 이유를 대서든, 사실관계가 어찌 되었든 간에 문정권은 틀림없이 무능해야 하고 무책임해야만 한다는 자기최면이다.

이제 생활필수품이 된 마스크 수요가 하루 5천만 개이고 생산이 1천만 개라면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시장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생활필수품 시장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우선순위를 잘 따져 불필요한 마스크 수요를 줄여야 하고, 생산과 공급을 격려해야 한다. 하지만 1인당 매일 마스크 1매를 제공하는 것은 희망사항이지 정책목표가 아니다. 실현할 수 없는 일은 애초부터 정책 문제가 될 수 없다. 해답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No solution, no problem”)(Wildavsky 2018: xxxiii). 정책목표는 가용할 수 있는 자원(제약요소)의 범위 내에서 정해야 한다(p. xli). 따라서 정부가 마스크를 1인당 매일 1매씩 제공하지 못한다고 성급하게 비난해서는 안된다. 희망고문이라니… 대체 누가 그런 희망을 가졌단 말인가. 정책비판이 아닌 괜한 트집잡기이자 정치공세일 뿐이다. 하물며 마스크 5부제 자체를 사회주의로 규정하는 것임에랴.

줄서기 이론(queueing theory)에서 보면 선착순으로 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언제나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다. 고객의 순서를 정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시장원리대로 지불할 능력(의사)에 따라 서비스나 재화를 제공할 수 있다. 고객들의 기회비용이 현저하게 다르다면 우선 순위를 따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사회의 효용을 최대화시킬 수 있다. 예컨대, 의료진과 보건 담당자에게 먼저 더 많은 마스크를 제공하고, 환자, 노약자 등으로 순서를 정한다. 고객 개개인의 기회비용을 잘 모르고 형평성과 공정성이 가장 중요하다면 추첨을 하거나 일정 절차에 따라 배급하는 것이 좋다. 정부가 제약조건(자원)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의료진과 환자를 우선시하고, 마스크 5부제를 실시하고, 사재기를 경계하고, 생산을 독려한 것은 적절한 조치다. 정치 이념이나 종교와 관계없는 과학과 경제학이다. 상식에 가깝다.

참고문헌

  • Wildavsky, Aaron. 2018. The Art and Craft of Policy Analysis. Palgrave MacMill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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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하기: 박헌명. 2020. 마스크 공급 정책과 “마스크 사회주의.” <최소주의행정학> 5(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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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주주의 증상

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이 지구촌 이곳 저곳에서 산불처럼 번지고 있다. 1월 초 중국에서 바이러스성 폐렴으로 알려진 뒤 한국, 일본, 이란, 이탤리를 넘어서 유럽과 미국을 강타하고 있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3월 17일 현재 확진자는 중국이 8만명(사망자 3,226명), 이탤리가 2만 8천명(사망자 2,158명), 이란이 1만 5천명(사망자 853명), 스페인이 9천명(사망자 309명), 한국이 8천명(사망자 75명), 미국이 4천명(사망자 78명)이다. 이탤리, 이란, 스페인, 미국의 상승세가 무섭다.

처음에는 남의 나라 얘긴 줄 알았지만 1월 20일 국내에서도 감염자가 확인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엉겁결에 재난 영화 속으로 떠밀려 들어온 것같은 황당함과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피부에 확 와닿는 두려움에 어쩔 줄 모르고 있다. 사람들은 집밖으로 나가는 것을 꺼려하면서 감옥같은 하루하루를 근근히 버티고 있다. 특히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은 점점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회사는 직원들을 집에서 근무하도록 했고, 가게와 식당은 사실상 문을 닫았고, 학교와 유치원은 개학을 연기하고 있다. 승객이 줄면서 버스가 멈추었고, 지하철과 택시도 한산해졌다.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하늘길도 뱃길도 닫혔다. 세계대전이라도 터진 듯 “코로나 전선”은 점점 타오르다가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하고 있다. 국경을 걸어 잠그고 금융시장을 뒤흔들고 사람들의 일상을 집어삼키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전문성, 투명성, 창의성

한국 정부는 다른 어느 정부보다도 신속하고 과감하고 공격적으로 신종코로나바이러스 사태를 관리해왔다. 전문가집단인 질병관리본부(중앙방역대책본부)를 중심으로 감염자를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감염경로를 파악해왔다. 대통령이 정은경 본부장의 건강을 걱정하고 국무총리가 행정지원을 이끄는 모습은 낯설다. 박근혜 정권에서 질병예방센터장이었던 정본부장은 2015년 중동호흡기증후군(MERS) 사태 수습에 책임을 지고(권한을 쥐고 있던 장관과 고위 공무원 대신) 징계를 받았다. 당시 질병관리본부를 떠났던 다른 공무원과는 달리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던 그녀의 전문성과 성실함을 인사권자가 놓치지 않았으리라. 비록 상황이 많이 진전되어 현재 국가차원에서 재난을 관리하고 있지만 질병관리본부의 역할은 여전하다. 아직도 일부 교회 등에서 “영빨”을 믿고 기도 모임을 지속하거나 정파성에 매몰되어 무책임한 비난과 저주를 쏟아내고 있으나, 정부는 전문성과 과학에 근거하여 냉철하게 재난에 대처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는 매일 신종바이러스 현황을 발표하고, 방송을 통해 확진자와 사망자 통계를 시시각각 내보내고 있다. 두 달 넘게 매일 전염병 소식을 생방송(뉴스특보)으로 전하고 있다. 이러한 투명성은 재난 상황에서 기승氣勝을 떨치는 유언비어를 차단하였다. 문재인 정부가 마스크 300만장을 중국에 보냈다거나, 북한에 몰래 마스크를 보내서 마스크 대란을 자초했다거나, 마스크 유통업체 대표가 영부인의 동창이어서 특혜를 받았다는 등의 날조기사가 등장했지만 약발이 오래가지 못했다. 보건용 마스크 공급에 관련된 과도한 비난과 선동(예컨대, “마스크 사회주의”)도 힘을 쓰지 못했다. 또한 사생활 침해라는 우려도 있지만 신용카드, 교통카드, CCTV 정보 등을 통한 확진자의 동선을 제공하고 있다.

질병관리본부에서 자체 개발한 실시간 유전자 증폭 검사법(RT-PCR)은 바이러스감염 판별에 걸리는 시간을 하루에서 6시간으로 단축시켰다. 하루에 1만명을 검사하던 역량이 요즘에는 2만명까지 늘어난 까닭이다. 물론 의료관계자의 열정과 헌신이 이뤄낸 기적이기도 하다. 최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우리나라의 진단도구를 받아가려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또한 “차탄채로”(drive-through) 검사하는 방식은 환자가 머문 방을 소독할 시간을 벌고 환자간 감염을 막을 수 있는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운영법이다. 국내외의 호평을 받은 이 방식은 최근 미국에 역수출되었고(미국식 차탄채로 주문법이 한국식 진단법으로 진화되어), 영국과 독일을 비롯하여 반한정서가 불고 있는 일본에서도 도입되었다. 도시와 하늘길과 국경을 폐쇄하지 않고서도, 자국민은 물론이려니와 불법체류자들까지, 전국에서 사실상 무료로 감염여부를 빠르게 검사해주고 있다. 한국의 대응에 세계가 찬사를 보내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닮아가는 아베 정권

반면 일본의 상황은 한국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다. 아베 정권은 매우 정치적이고 느리고 소극적이고 방어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전문의료진이 아닌 정치권이 사태 수습을 주도하고 있고, 정부 대응이 투명하지 않다. 현재 일본에서 824명이 감염이 되었고 24명이 사망하였다고 발표되었지만, 그 숫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요코하마항에 정박중인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에서 발생한 환자를 방치하였다가 700명이 넘게 감염되었고, 그 숫자를 통계치에서 빼려는 꼼수를 부렸고, 하선한 승객을 격리조치하지 않고 집으로 보냈다. 어떻게든 일단 감염자 수를 줄여보려는 아베 정권의 의도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한국 언론과는 달리 일본 언론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덮는 듯 무뎌진 날을 내리고 지나칠 정도로 평온하다.

일본 정부는 여행을 자제하고 만일 감염이 의심되면 집밖으로 나가지 말고, 고열이 며칠 지속되면 전화하라고 권하고 있다. 좀 박하게 말하자면 각자 알아서 조심하고, 재수없이 감염되면 집에 칩거하다가 응급실에 실려가라는 것이다. 비용은 둘째 치고 검사를 받고 싶다고 해서 언제 어디서나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시민들은 답답할 뿐이다. 정부 불신과 불안이 휴지까지 사재기한다.

이러한 아베 정권의 대응은 지난 2014년 일어난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 박근혜를 지키려고 이리저리 틀어막고 꼼수를 부리다가 탈이 난 것이다. 올림픽을 개최하고 헌법을 뒤바꾸려는 욕심이 과하여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내팽개치고 있다. 수구군국주의자들의 시대착오적 정신줄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막는 국면으로 몰고가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재난 앞에서 정부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반추하게 되는 춘삼월이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 <최소주의행정학> 5(3): 1.

기본
반민주주의 증상

차악을 긍휼하고 지켜야 미래가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1월 28일 자 <경향신문>의 정동칼럼에 게재된 “민주당만 빼고”를 지난 달 13일 공직선거법위반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두어 주 전에 발행된 사설私說에 늦은 시비를 거는 것이 우습다. 쓸데없는 짓이다. 공당에서 언론사와 기고자를 고발하는 것도, 반발이 일자 고발을 취소하고 사과하느라 허둥대는 모습도 곱게 보이지 않는다. 하물며 지금껏 문학과 사상과 예술을 억압했던 자들이 이제와서 표현의 자유를 들먹이며 민주당을 비난하는 일임에랴. 언론중재위원회가 12일 해당 私說을 공직선거법 8조(언론기관의 공정보도의무)를 위반했다고 결론냈지만, 이 소동을 법위반과 정쟁으로 보는 시각이 불편하다.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

일부러 날을 잡아 “민주당만 빼고”를 정독한 느낌은 한마디로 자괴감이다. 아무리 연구교수라지만 어설픈 “아줌마 논법”에 수구신문의 글쓰기라니…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것인지…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 “선거는 무용하고 정치는 해악”인 상황에서 왜 “민주당만 빼고” 찍으라는 것인지… 멀쩡한 신문사에서 음식으로 치면 맛을 논할 수준도 안되는 먹을거리를 상에 올린 까닭은 대체 무엇인지… 소위 “기레기”로 표현되는 언론인의 수준 그대로는 아닌지. 공직선거법을 어겼는지 표현할 자유를 침해했는지를 따질 문제가 아니라 글쓰기와 신문사의 기본과 상식에 관한 문제다.

왜 차악을 선택해야 하는가?

하지만 나는 “선거 과정의 달콤한 공약이 선거 뒤에 배신으로 돌아오는 일을 막아야 한다. 하지만 그 배신에는 국민도 책임이 있다.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최악을 피하고자 계속해서 차악에 표를 줬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최악이나 차악이나 나쁜 것은 매한가지여서 어차피 선거가 끝나면 상전노릇을 할테니 차악을 편드는 것이 부질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데도 결론은 선거도 정치도 없애야 한다(혁명을 해서라도 판을 뒤집자)가 아니라 뜬금없이 여당을 찍지 말라니… 최선이 있는데도 어리석은 국민이 매번 차악을 선택했다가 배신을 당했다는 말인가? 대체 언제 어디에 최선(틀림없이 모든 공약을 그대로 집행하는 정당)이 존재했단 말인가? 순진무구한 노녀老女의 두서없는 푸념이자 무책임한 망발이다.

그런데 정말 최악을 피하고자 차악을 선택한 것이 잘못일까? 2월 16일 SBS의 <주영진의 뉴스브리핑>에 출연한 글쓴이는 수구세력에게 말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으니 민주당에게 비판한 것이라고 했다. 그나마 싹수라도 보이는 자들에게 쓴소리를 한다는 나름의 합리성이자 아량일 터이다. 하지만 강자(기득권자)의 폭력에 시달리는 약자에게 너도 잘한 것이 없다며 죽도록 발길질을 해대는 어리석음이다. 강자의 포악함에는 으레 그러려니 눈과 귀를 닫은 채 약자의 잘못만 야박하게 따지고 난도질하는 자들이다. 최악을 치죄治罪하지도 않으면서 강자의 편에 서서 차악을 훈계하는 짓이다. 자신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모세를 원망한 못난 군중의 정신줄이다. 그래서 바보 노무현을 잃은 것이다.

인간에게 차라리 차악이 최선이다

소정 선생님(1986: 140)은 “물론 못난 야당이 어진 야당만은 못하다. 그러나 야당이 여당에게 맞아 죽는 것보다는 신통치 않더라도 야당이 살아 남아 주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라고 적었다. “부정을 하는 구성원이 있는 [구조적으로 선한] 야당이 부정을 안하는 구성원이 있는 포악한 [구조적으로 악한] 여당보다 낫다”(1991: 308). 신이 이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요셉을, 윤리적으로 나쁘지만 구조적으로 힘없는 약자의 자리에 있는 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다(1991: 307). 요셉은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지만, 형(카인)에게 맞아죽은 아벨과는 달리 살아남아 최소한도의 회개라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죽이려던 형들을 용서할만큼 정직하고 성실한 요셉을 낳을 수 있었다. 한 단계 진전이다.

소정 선생님(1991: 306)은 “신이 최대의 개인윤리를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은 점이 멋이 있다. 신은 이상적 현실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적 이상주의자이다”라고 풀어냈다. 최소한의 변화(회개)라도 있어야 다음에 좀더 나은 권력의 견제자가 등장하며, 비로소 민주주의가 가능해진다(1986: 140-141). 그러니까 지금 당장 최선이 아니라고 해서 최악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 어쩌면 인간에게 최선은 이룰 수 없는 꿈일 뿐이다. 계속 타락하는 쪽으로 가지 않는다면 반성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또 후회하면서 다음 단계로 성장하는 차악이 차라리 최선이다. 그러니 최소한이라도 악행을 돌아보고 말귀라도 알아들으려는 차악이 얼마나 귀한가. 어쨋든 그 미약한 시작이 없다면 어찌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인내심을 가지고 차악의 성장을 지켜보라

민주당이 여당이니까 구조적으로 악하다는 것은 착각이다. 여전히 폭력을 휘두르는 강자는 민주당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던 수구세력이다. 애초부터 친일부역세력과 친미반공세력을 등에 업고 지금껏 해먹고 있는 구조악이다. 천우신조天佑神助로 민주당이 집권하긴 했지만 여전히 민주세력은 위태롭고 아쉽다. 적폐청산도 개혁도 시원스럽지 못하고 더디기만 하다. 수구세력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패악질과 “침대축구”로 버티는 한 무던히 참고 견디고 기다려야 한다. 세월호 7시간을 양보해서라도 탄핵을 취해야 했다. 누더기질로 복잡한 셈법이 되었다 해도, 가짜정당으로 무력화되었다 해도 선거법을 바꿔야 했다.

수구세력의 파상공세와 수많은 악재에도 불구하고 집권당의 지지도는 견고하다. 민주당이 잘해서라기보다는 백성의 소리에 귀기울이는 시늉이라도 하기 때문이다. 굼뜨지만 야곱(열린우리당)에서 요셉으로 성장해가는 변화를 보여준다. 하늘(백성)은 어리석지 않다. “민주당만 빼고”야말로 이상에 집착하여 이성을 잃은 자들의 횡설수설이자 “죽쒀서 개주는 짓”이다. 당장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어린 새싹을 닦달하고 뿌리채 뽑아버려서야 어디…

인용하기: 박헌명. 2020. 차악을 긍휼하고 지켜야 미래가 있다. <최소주의행정학> 5(2): 1.

기본
새로운 가치

행정을 모르는 행정학의 수치와 시련

지난 여름 오랜 만에 원주에 다녀왔다. 25년 전 군복무를 시작한 곳이어서 인상이 깊게 남아있다. 몇년 전에는 원주에서 횡성으로 가는 길을 따라 차를 몰아보았다. 출퇴근 버스를 타고 묵계리에서 전투비행단을 거쳐 원주로 내달리던 길이었다. 하지만 주변이 워낙 몰라보게 바뀌어서 오랜 추억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원주에 가서 추억을 잃다

이번에는 옛날처럼 시외버스를 타고 가서 외곽으로 옮긴 터미널에 내렸다. 원주역에서 시작되는 A도로와 B도로를 직접 걸어보았다. 지금은 각각 원일로와 평원로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젊은이들로 북적이던 원주기독병원 앞 길모퉁이에 들어서니 당시 워크맨으로 즐겨듣던 김태영의 “피카소에게”가 들리는 듯했다. 불이 났다던 중앙시장은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시원한 배를 고명으로 얹어주던 남경막국수집과 밥그릇을 요란스레 두드리며 돼지삼겹살을 볶아주던 식당은 찾을 길이 없었다. 생전 처음 서울역에 내린 촌놈처럼 이리저리 기웃거렸지만 낯설기만 한 풍경에 발걸음을 돌렸다. 세파에 밀려 기어이 어딘가로 옮겨갔으리… 눈과 코와 귀가 기억하는 즐거움을 잃어버린 것이다.

행정을 모르는 행정학?

같은 시절 대학원을 다녔던 분과 점심을 같이 했다. 몇년 만에 낯선 동네에서 회포를 나누었다. 혁신도시에 공공기관이 자리잡은 이야기, 죄다 논밭이던 황골이 카페촌으로 환골탈태한 이야기, 공부하던 친구들이 사는 이야기, 애들 키우는 이야기를 하다가 어쩔 수 없이 행정학 이야기로 접어들었다. 연구원에서 오래 근무하고 있는 분이어서 요즘 무엇이 학계의 관심사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분위기가 어떤지 귀동냥이라도 할까 싶었다.

내가 받은 첫번째 인상은 열성을 가지고 매진하는 학자들이나 연구원들이 드물다는 것이다. 현실 속의 행정문제를 치열하게 논의하고 의미있는 규칙성을 찾아내는 본업에 충실하지 못하고 있다. 주어진 연구과제를 때맞추어 “밀어내기”에도 버거운 상황이다. 얼마나 현실과 이론에 부합하는지를 따져볼 겨를도 없다. 주어진 시간 안에 수치로 표현된 성과목표를 달성해야 살아남는 판이다. 질보다는 양이라 했던가. 이른바 잘 팔리는 주제로 논문이나 연구과제를 많이 생산해 내는 자가 장땡이다. 한가롭게 이론을 따지고 방법론을 따지고 의미를 되새기는 자들은 진화를 거부한 종이다. 아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낙오자이다.

두번째 인상은 행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공직사회와 공직자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다. 연구원에서 지방정부를 포함한 공공기관의 정보를 조사하여 축적하고 있지만 막상 쓸만한 정보는 거의 없다. 숫자로 적힌 통계치를 가지고 있기는 하나 대개는 수박겉핥는 정보일 뿐이다. 공공기관에서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다가 마지 못해 생색만 낸 측면도 있다. 하지만 행정학자가 어떤 정보가 어떤 형태로 어디에 있는지, 어떤 정보가 유용한지,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두리뭉실하게 자료를 달라는 경우가 더 많다. 행정학자라지만 관료들이 현장에서 실제 일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책과 논문의 언어로 말하고, 관료들은 행정 현실의 언어로 말한다. 몇년 전 고위 공무원과 대화를 나누면서 느꼈던 괴리감이다. 그 간극이 커지면 서로 의미있는 대화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알맹이는 없고 변죽이나 울리고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관료들이 행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쓸만한 정보를 줄 까닭이 없다. 어차피 제대로 이해하지도 사용하지도 못할 위인들 아닌가? 후원이나 연구과제나 따내기 위해 굽실거리는 학자의 자존심이라니.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는 행정학

지난 해 만난 어느 선배는 한국에서 행정학이 독립학문으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렸다고 진단했다. 대형서점에서 행정학 서각이 점점 줄어들었고, 이제는 아예 사라졌다고 했다. 대신 행정학 책은 정치학이나 법학 책시렁에 곁다리로 꽂혀있다고 했다. 아님 공무원 수험서 서가에서나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정체성 위기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를 들를 때마다 행정학 서각이 거의 그대로인 것이 의아스러웠지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른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몇년 전 어느 행정학자가 한국 대학의 행정학과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며 우려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행정학은 행정고시에나 필요한 한 과목 쯤으로 치부되고 있는 느낌이다. 여전히 행정학의 정체성과 유용성을 따지고 행정학의 위기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30년 전에 비해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행정학과 수와 학생 수가 줄어든 만큼 심각해졌다. 아니 행정고시에서 차지하고 있는 행정학의 존재감에 정확히 비례한 학과의 위상이라 말해야 하나. 고시로 흥했으니 고시로 망하게 되는가… 행정고시에 기대어 도끼자루 썩는 줄을 알면서도 안일했던 업보業報다. 화려하게 껍데기를 치장하는데 열을 올리면서도 정작 학문의 기반을 다지고 쓸모를 넓히는데 게을렀던 업과業果다. 이젠 잘 팔리지 않는 행정학 교과서보다는 방법론같은 실용서적을 출간하는 것이 낫다는 권고를 나는 자괴감으로 들었다.

행정문제에 답을 주는 행정학이 되어야

과거에 비하면 행정학 논문이 질과 양에서 많이 향상되었다. 외부의 지원을 받는 연구과제도 많이 늘었다. 하지만 수치로 표시된 행정학 성과물이 얼마나 행정현실에서 쓸모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행정현실을 이해하고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한낱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는다. 행정학이 무엇을 공부하는 것인지,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 돌아봐야 한다. 기업과 함께 경영문제를 풀어감으로써 존재감을 키우고 있는 경영학에서 배워야 한다. 고시와 학위를 위한 행정학이 아니라 실제 정부의 일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행정학이 되어야 한다. 선문답같은 훈수질이 아니라 행정문제를 진단하고 현실적인 답을 주는 행정학이어야 한다.

인용하기: 박헌명. 2020. 행정을 모르는 행정학의 수치와 시련. <최소주의행정학> 5(1): 1.

기본
비폭력과 최소주의

방위비분담금 협상과 한미동맹의 민낯

미국 트럼프 정부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으로 50억 달러(6조 원)를 요구하였다. 지난 2월에 어렵게 합의된 9억 2천만 달러(1조 원)에 비하면 황당한 금액이다. 말이 증액이지 일방적인 협박이다. 외교력이 아닌 군사력을 앞세운 힘자랑이다. 정치인의 협상이 아닌 트럼프의 입에서 시작된 장사치의 후려치기다. 적나라한 강자의 폭력이다. 피로 맺었다는 한미동맹의 민낯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미동맹의 민낯

한미동맹은 1951년 군작전통제권을 미국에게 반강제로 빼앗기고 1953년 휴전 직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 출발했다. 북진통일을 자신하던 이승만이 한강철교를 폭파하고 도망간 뒤, 반공포로를 석방하면서까지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잡은 것이다. 이후 한국군은 미군의 보호를 받으며 안주했고 1994년에서야 겨우 평시작전권을 이양받았다. 노무현 정권에서 전시작전권을 돌려받으려 했으나 수구세력의 완강한 반대에 부딫혀 아직까지 표류하고 있다. 특히 유재흥劉載興은 한국전쟁에서 2군단과 3군단을 말아먹음으로써 작전권을 상실케 한 장본인인데, 그런 그가 2004년 전시작전권 환수를 반대하고 나섰다. 한미동맹을 바라보는 수구 세력의 시각을 고스란히 보여준 장면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스스로 나라를 만들거나 지킬 생각도 의지도 없다. 미국이든 일본이든 강자에게 빌붙어 호의호식하려는 자들이다. 미군이 없으면 북한에게 당하기 때문에 무슨 수를 쓰든 붙잡아놔야 한다. 한미동맹이 없는 “그들의 대한민국”은 없다. 그러니 지소미아 파기도 철회하고 방위비 분담금도 달라는 대로 줘야 한다. 성조기를 휘날리며 미국 대통령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누가 감히 불경스럽게 패권자의 심기를 건드린단 말인가.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는 한 미국에게 500억 달러를 준다 한들 무슨 대수인가? 트럼프가 수천 명의 공녀를 바치라 한들 무슨 상관인가?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나갈 돈도 아니며 자신의 딸이 끌려갈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 강제징용이나 성노예로 끌려가 고초를 겪어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서는 미일중러를 따지지 않는다. 나라와 민생이 망하든 말든 별로 개의치 않는다.

이러한 친일·종미·반공 수구 세력에게 한미동맹은 생명줄이자 성역이다. 국가안보가 우려된다면서도 한미동맹이 튼튼한지를 걱정할 뿐, 국방비를 더 내고 군역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작전수행능력을 높이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주한미군을 줄이거나 철수한다는 말만 나와도 까무라치는 정신줄이다. 천문학적인 돈이 내야 한다며 거품을 무는 자들이다(대체 왜 미국이 이런 자들을 지켜줘야 하나?). 전시작전권을 포기한 지 70년인데도 아직 환수 준비가 안되었다고 정색하는 자들이다. 60만 대군과 최신 무기가 있다지만 스스로 작전을 세워 제대로 병력을 움직이고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모른다. 몸뚱아리는 사지 멀쩡한 어른이지만 머리는 백일된 아기 수준인 것을… 작전능력이 없어서 작전권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작전권이 없으니 작전능력이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스스로를 지킬 의지가 없다. 한미동맹이 만병통치라는 미신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지와 자신감이 중요

지금까지 한미동맹은 나라를 지키는 마법이었다. 수구 세력이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려고 퍼트린 신화였다. 한국과 미국이 혈맹이라지만 수구 세력의 짝사랑에 가깝다.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는 군사적으로, 심리적으로 식민지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나라 간에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다. 상식이자 철칙이다. 150년 전 미국은 우리와 전쟁(신미양요辛未洋擾)을 치른 적이었다. 미국이 계속 동맹으로 남을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중국, 일본,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냉엄한 국제질서다. 이런 마당에 백성들이 마르고 닳도록 한미동맹에만 목을 매고 한국군이 미군의 용병처럼 군다면 한심한 일이다. 이제는 그 허상을 걷어내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스스로를 옥죄는 환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중요한 것은 돈이나 병력이나 무기가 아니다. 최고 용병을 데려오고 첨단 전투기와 미사일을 들여온다고 나라를 지킬 수 없다. 백성이 주인으로서 스스로 지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적이 쳐들어왔다고 모두 도망친다면 천하무적 용병인들 목숨을 걸고 싸울 까닭이 있을까? 아무리 한미동맹이 강고하다 해도 결국 우리를 지키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또한 쓸데없는 자학이나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우리의 능력을 냉정하게 평가하고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무역과 군사력에서 세계 7위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가 아닌가. 아베 정부의 수출규제에 대한 단호한 대응과 시민들의 대일본 불매운동은 우리의 의지와 자신감의 표현이다.

합리적 근거를 대면서 할 말을 하라

트럼프의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는 사실상 폭력 행사다. 하지만 강자의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면 안된다(2008: 68-69). 날선 말로 트럼프를 비난하거나 미대사관에 쳐들어가면 안된다. 이런 난동은 미숙하고 불완전한 대응이다. 아무리 억울하고 무섭다 해도 끝까지 참고 비폭력에 의지해야 한다. 보편성있는 원칙과 상식과 합리성에 근거하여 할 말을 해야 한다. 강자조차 감히 거절하지 못할 만한 올바른 진리를 말해야 한다(2008: 66). 비폭력은 매를 맞으면서도 할 말을 하는 것이지 공포에 질려서 맞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1991: 118). 트럼프의 도발에 찍소리도 못하고 꼬리를 내린다면 굴종이지 비폭력이 아니다. 그래서 비폭력은 비굴한 것이 아니며 약자를 보호하고 약자의 품격을 높인다(1991: 19; 2001: 149).

예컨대, 주한미군의 유지비가 많이 든다고 하니 제대로 원가를 따져본다. 분담금에 포함되지 않는 시설비, 전기료, 물세 등을 포함하여 계산서에 올린다. 미국이 누리는 편익도 하나하나 따져 수치로 보여준다.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여 현재 분담금도 과한 것임을 증명한다. 한미동맹이라는 약발이 예전만 못한 상황이다. 이제 깨어있는 국민의 의지와 자신감으로 할 말을 하면 된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방위비분담금 협상과 한미동맹의 민낯. <최소주의행정학> 4(12): 1.

기본
민주주의로 가는 길

조국전쟁: 曺國의 고난과 祖國의 평화

조국 법무부 장관이 지난 달 14일 사임했다. 장관에 임명된 지 35일 만이다. 8월 9일 장관후보로 지명된 이후 수구세력들은 수많은 의혹을 제기하고 검찰에 고발하였다. 수구 야당은 시간을 질질 끌면서 의혹공세에 집중하다가 9월 2일로 예정되었던 인사청문회를 무산시켰다. 조후보자는 당일 11시간 가까이 기자간담회를 열었다. 여당과 야당은 우여곡절 끝에 6일 인사청문회를 열었고, 인사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못한 상태에서 문대통령은 9일 장관임명을 결정하였다. 이른바 “조국전쟁”이다.

“가족사기단”과 “가족인질극”

수구 야당은 반발하면서 조장관을 장관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적법하게 임명된 장관을 장관이라 부르지 못하겠다며 꾸역꾸역 “조국씨”라고 우겼다. 제기된 의혹을 반복하여 물고 늘어지면서 국정감사는 “조국감사”가 되었다. 수구 언론도 조장관에 대한 집요한 공세를 멈추지 않고 검찰발 기사를 뿌려대고 있다. 검찰의 행보에 따라 국면이 요동치고 있다. 이젠 조장관 여식이 꼴지인 주제에 포르쉐를 타고 다녔고, 시험도 치지 않고 대학원까지 진학했다는 낭설은 벌써 고조선 시절의 얘기가 되었다. 약발이 다한 소재는 사실이든 아니든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수구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파렴치한 “가족사기단”이라는 낙인이 판결문에 찍힌 느낌이다.

검찰은 조장관 식구들은 물론 그 주변 사람들까지 샅샅이 훑고 있다. 수구 세력의 고발에 따른 적법한 조사라고 했다. 인사청문회일정이 합의된 다음 날인 8월 27일 강제수사를 시작하여 정국을 흔들었다. 인사청문회가 열리던 6일 밤에는 조장관 배우자를 조사없이 기소하였고, 16일부터는 여식女息과 자식子息을 차례로 불러 조사했다. 23일에는 11시간 동안 조장관 자택을 수색했다. 지금까지 백여 차례에 이르는 압수수색이 있었다. 수구 언론과 야당은 검찰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마침내 조장관의 당질(9월 16일), 배우자(10월 24일), 동생(10월 31일)이 차례로 구속되었다. 이제 검찰의 칼날은 조장관을 향하고 있다.

이에 유시민씨는 유튜비 방송 <다스뵈이다>와 <알릴레오>에서 참전을 선언하면서 이 사건을 “가족인질극”이라고 규정했다. 검찰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해 온 조장관을 낙마시키기 위해 검찰이 조장관의 식구들을 잡아놓고 벌이는 인질극이라는 말이다. 아무리 털어도 조장관에게서 먼지가 나오지 않으니까 병약한 배우자를 앞세우고, 딸과 아들을 고졸로 만들겠다며 위협한다. 애초의 계산법으로는 검찰이 청와대에 불가 신호를 주면 문대통령이 지명을 철회하고, 안되면 압수수색과 기소로 겁을 주면 후보자가 자진사퇴를 하고, 이것도 안되면 실력행사를 통해 대통령이 장관임명을 포기하도록 한다. 관련자를 구속기소하고 피의사실을 흘리면 여론을 흔들 수 있다. 지지율 하락을 이겨낼 장사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문대통령과 조장관은 검찰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꽉막힌 인간”들이었다. 웬만하면 다들 알아서 물러나고 자수하건만, 참으로 눈치도 요령도 없이 쇠심줄같이 질긴 자들아닌가. 그래서 사달이 난 것이다.

비록 장관이 사임을 했지만 검찰은 여기서 없던 일로 돌릴 수도 없다. 사퇴하든 말든 목표는 조장관이기 때문이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장관의 식구들이 “가족사기단”임을 증명해야 한다. 정경심씨를 구속한 뒤에도 수차례 불러야 하는 까닭이 있다. 사실보다 형식이다. 검찰 체면에 “모냥빠지는” 일은 죽기보다 싫기 때문이다. 지난 10월 4일 <뉴스공장>에 출연한 조민씨는 고졸이 되어도 상관없으니 어머니가 검찰의 압박에 못이겨 자녀를 지키기 위해 허위자백을 할까봐 괴롭다고 했다. 현직 부장검사인 임은정씨는 조장관의 사임을 두고 “[검찰이] 죽을 때까지 찌르니, 죽을 수밖에”라고 적었다. 하지만 가족인질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찌르니, 죽을 수밖에

검찰조사를 지켜보자면 의금부에서 무슨 대역죄인을 다루는 듯하다. 조장관 식구들이 저질렀다는 혐의는 진학(인턴쉽, 장학금, 논문저자), 표창장, 사모펀드, 웅동학원 문제다. 과연 최고 검사들이 달라붙어 두 달 넘게 조사할 사항인가? 학생이 인턴쉽을 하루 더하고 덜하고, 고등학생이 제 1저자가 되는지, 장학금이나 표창장을 받았는지 안받았는지가 왜 이리 문제가 되는지, 또 왜 밝히기 어려운지. 컴퓨터를 잘 모른다는 정씨가 어떻게 포토샵으로 표창장을 위조했다는 것인지. 대놓고 “스펙”을 권하는 그런 법제도를 만들어 활용해놓고 이제와서 전혀 몰랐던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이 옳은 일인지. 수백 억이 왔다갔다 판에 기껏해봤자 30억도 안되는 돈을 가지고 기업을 주물렀다는 게 말이 되는 것인지. 인사청문회에 출석한 웅동학원의 “어르신”이 “애”로 취급하는 조장관이 이사회에서 무슨 역할을 했다는 것인지. 불법을 저질렀다면 경중에 따라 벌을 받을 일이지만 검찰이 시퍼런 칼을 들고 밝히려는 혐의들은 초라하다 못해 허무하기까지 하다. 반면 세월호 침몰, 삼성의 경영권 승계, 신속처리안건 파동, 기무사의 계엄령 문건 등에 대한 조사는 어찌하여 이리도 더디고 물러터진 것일까?

조장관에 대한 비난은 (1) 불법이나 탈법이 아니라 윤리와 도덕에 관한 것이다. (2) 평소에 정의와 공정을 강조하면서 입바른 소리를 하던 사람이 뒤로는 떳떳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3) 게다가 권력을 가진 자가 약자의 몫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첫번째 비판은 과하지 않다면 타당하다. 하지만 나머지는 불순하고 악랄하다. 붓다나 예수나 공자를 모셔와서 법무부장관을 시키자는 소린가? 언행일치를 못했다고 해서 정의와 공정을 말하지 말라는 것인가? 수구세력의 일상화된 언행불일치는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진보세력에게는 가혹하게 도덕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합당한가? 또한 문대통령과 조장관을 강자로 보고 비난하는 것은 착시錯視다. 정말 그랬다면 언론이든 야당이든 검찰이든 이렇게 노골적으로 대들지 못했을 것이다. 수십 년 동안 기득권을 주물러 온 세력이 한순간에 해체되겠는가? 대통령 하나 바뀌었다고 하루 아침에 평등·공정·정의가 실현될 것이라 믿었나? 기득권을 틀어쥐고 있는 수구세력의 교활한 계략에 놀아나는 순진함이다.

지난 8월 23일부터 서울대, 고대, 연대, 부산대에서 촛불집회가 개최되었다. 참석자들은 불공정과 진상조사를 외쳤지만, 의혹을 사실로 단정하고 자신만의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을 뿐이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처절한 불공정을 말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대학가 집회는 그 자체로 기득권의 다른 이름이다. 과학고, 외고, 자사고 학생들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정작 개혁되어야 할 적폐가 정의가 죽었다고 외치고 있으니… 주최자 논란도 있었지만 대학가 촛불집회가 500여명에 머물고 흥행에 실패한 까닭이다.

진영논리? 국론분열?

결국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적나라한 힘겨루기다. 친일반민족세력과 일반 백성의 가치 충돌이다. 조장관의 친구라는 진중권씨는 “다들 진영으로 나뉘어 가지고 지금 미쳐버린 게 아닌가”라며 한탄했다. 참여연대의 김경율 회계사와 신문칼럼을 써온 서민 교수 역시 다들 진영논리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모두 제기된 의혹이 사실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강자의 힘에 당했던 피해의식이랄까, 도덕우월성에 대한 집착이랄까, 강박이랄까? 왜 그 가혹한 잣대를 조장관 식구들에게만 들이대는가? 자기 편에 가혹하고 남의 편에 관대한 것이 정의이고 진리인가? 옳든 그르든 무조건 권력자를 깎아내리고 비난해야 하는가? 어용御用을 피하고 지조를 지키는 일이니 멋져보이는가?

국론분열이라는 말도 음흉하다. 국론이 통일된 적이 언제 있었던가? 수십, 수백만이 모인 검찰개혁 촛불집회와 천여 명이 모인 태극기집회를 찬반이 팽팽하다고 보는 자들의 궤변이라니… 어쨋든 나라가 시끄러우니 죄가 있든 없든 조국이 물러나고 대통령은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경제가 어렵고, 돼지열병이 위험하고, 국가안보가 위태롭다고 하지만, 어쨋든 결론은 조국사퇴다

수구 야당은 장관후보로 지명되기 전부터 조장관을 벼르고 있었다. 조국을 주저앉히기 위해 조국이 사노맹이라고 헐뜯고 검찰에 고발하였다. 평소 그가 “강남좌파”로서 사사건건 자신들을 (정의와 도덕성으로) 괴롭혔기 때문에, 또 가만놔뒀다가는 미래의 후환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토록 시끄럽게 들쑤시고 다닌 것이다. 과도한 응징이다. 허망하게 정권을 빼앗긴 것에 대한 분풀이다. 나라가 어찌되든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수구 야당도 언론도 검찰도 같은 편에 서서 적폐청산과 개혁을 흔들고 좌초시키고 있는 모양새다.

광화문에서는 수구 여당과 일부 기독교단이 주최하는 태극기집회가 벌어지고, 서초동과 여의도에서는 개싸움국민운동본부 주도로 검찰개혁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다. 수구 세력은 상대방이 사실을 외면하고 진영논리에 매몰되어 있다고 비난하지만 자신의 진영논리는 말하지 않는다. 유시민씨는 진영이 나뉘어 서로 다투는 것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니라 현실이라고 본다. 단지 얼마나 정당하게 합리성으로 논리를 겨루는가를 따질 뿐이다.

사실 진영이 있다면 수구 기득권이지 나머지는 진영이랄 것도 없다. 지킬 것이 있으니 성을 쌓고 방책을 세워두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백성들은 그냥 순리와 상식으로 냉정하게 현실을 보고 있다. 지킬 것이 없는 자들은 가진 자가 극도로 포악해질 때 서로 손을 잡고 떨쳐 일어날 뿐이다. 진영이 나뉘어져 있다면 그것은 가진 자가 포악하게 해먹었다는 증거다. 수구 세력들은 강고한 진영을 갖추고 있으면서 단결한 백성들을 진영논리라며 비난한다. 무조건 잇속을 지키자는 무논리가 생존과 정의를 쟁취하자는 논리를 비웃는 비열함이다. 끊임없이 의혹과 유언비어를 쏟아내어 백성을 이간질하는 자들의 음흉한 논리다.

“강남좌파”가 선택한 고난의 길

나는 조장관과 식구들이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설명을 들어도 입학전형이든 사모펀드든 우회상장이든 와닿지 않는다. 만일 의혹이 사실이었다면 조장관은 애초에 자리를 사양했을 것이다. 두달 넘게 식구들이 무방비로 조리돌림당하는 것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9월 2일 조후보자의 기자간담회를 대부분 지켜본 후 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조국은] 이른바 강남좌파라지만 충분히 현실을 치열하게 살았고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다… 여식의 진학이나 인턴이나 장학금 문제를 사과하긴 했지만 과한 비난이다. 그저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놓치고 아쉬워하고 후회하는 그런 수많은 일상의 조각일 뿐이다… 이런 사람에게 범죄사실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검찰이 욕보겠다.”

국정감사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은 법과 절차에 따라 엄정하게 수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석 달이 넘게 지속되고 있는 검찰수사는 이례적이며 지나치다. 수구 야당과 언론의 응원을 받으며 정예수사팀이 한 집안을 털었지만 정작 조장관에 대한 혐의를 밝혀내지 못했다. 이쯤되면 수사능력이 형편없었거나 애초부터 겨누었던 중대한 범죄사실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시민이나 김어준씨가 어렵지 않게 확인한 사실을 검찰이 아직도 뒤지고 있다는 것이 납득되지 않는다. 검찰은 어떻게든 조장관을 넘어뜨려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가족들을 몰아세우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누군가 견디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기를 고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공소권 없음”으로 깔끔하게 후퇴를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백 만의 사람들이 매주 서초동과 여의도에 모여 촛불을 밝힌 까닭은 무엇인가? 이러다가는 자신도 조장관처럼 저렇게 대책없이 난도질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연민이자 분노다. 그래서 검찰을 가만 놔둬서는 안되겠다고 각성한 것이다. 검찰개혁이라는 시대정신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조국이다”라고 뜻은 자연인 “조국”을 좋아하고 그 배우자 정씨를 응원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면 누려야 하는 기본권과 평범한 일상을 검찰의 횡포로부터 지키기 위함이다. 그 마음이 하나 둘씩 모여 거대한 촛불의 파도가 된 것이다.

의미있는 고난과 조국의 평화

수구세력은 왜 조국이 아니면 안되냐며 따진다. 쓸만한 인물이 그리도 없느냐고 힐난한다. 하지만 조국만 아니면 누구라도 괜찮다거나 왜 조국은 안되는가를 말하지 않는다. 물론 “가족사기단”이라고 몰아붙였지만, 사실은 검찰개혁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조국이 아니어도 누구든 사명감을 가지고 개혁을 추진하려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 속으로는 조국이 정말 개혁을 잘할 것같으니까, 그래서 나라가 잘 되는 끔찍한 결과가 나올까봐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주저앉히려는 것이다.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힘으로 찍어누르는 것이다. 그것은 곧 문재인을 끌어내리는 일이라고 믿는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주는 교훈은 전쟁이 끝났다고 평화가 자동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전쟁 중에 의미있는 고난을 통해 대안을 창출하는 자가 생겼을 때에만 평화가 온다는 점이다(1991: 333; 2008: 101, 270). 박근혜 탄핵으로 강자의 폭력이 잠시 멈추었을뿐 백성들이 원하는 태평성대는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개혁의 첫걸음을 떼었을 뿐 아직 갈 길이 멀다. 조장관은 집안, 학력, 외모, 재산, 관운 등에서 “금수저”였지만 꽃길이 보장된 기득권편에 서지 않았다. 스스로 고난의 길을 선택하여 검찰개혁의 불쏘시개가 되었다. 앞으로도 일가친척이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하겠지만 끝까지 참고 기다려야 한다. 그의 자기희생으로 검찰개혁이 이루어지고 마침내 정의와 인권이 세상의 원칙으로 정착되길 바란다. 曺國의 의미있는 고난이 祖國의 평화를 가져오길 바란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조국전쟁: 曺國의 고난과 祖國의 평화. <최소주의행정학> 4(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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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과 최소주의

윤석열의 선택과 최소주의자가 걷는 길

조국 전 민정수석이 지난 9일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장관 후보자로 지명되기 전부터 결사반대를 공언하고 나선 기득권 세력들은 한 달 넘게 자진사퇴를 압박했다. 수구언론은 조국 후보자의 배우자, 여식, 동생 내외, 웅동학원 등에 대한 신상털기 기사를 쏟아냈다. 여식이 포르쉐를 탄다거나 특별전형으로 진학을 했다는 헛소문을 보도했고, 심지어 어느 수구채널은 조국 후보자가 자택 아파트 주자창에 주차했음을 뉴스속보로 보도했다. 융단폭격같은 의혹제기에도 납득할 만한 사실은 찾아보기 어렵다.

수구야당은 여론전에 몰입하면서 인사청문회를 질질끌었지만 결국 소문만 요란한 잔치가 되어버렸다. 조장관이 임명되자 그들은 해임건의, 국정조사, 특검을 들고 나왔다. 의혹을 반복하고 단식을 벌이고 삭발削髮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사생결단이다. 급기야 문대통령과 조장관을 원색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국회의원이 법절차에 따라 임명된 장관을 장관으로 부르지 못하겠다며 꾸역꾸역 “조국씨”를 고집하고 있다. 비열한 막말과 욕설과 저주를 퍼붓고 있다. 정신병이고 과대망상이라고 했다. 정적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비난을 넘어서서 인간이란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과거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이다.

칼자루를 쥔 윤석열 검찰

결국 칼자루는 검찰이 쥐게 되었다. 수구기득권 세력이 조장관 식구들을 검찰에 고발하였고, 검찰은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수십 곳을 압수수색하였다. 소환도 없이 청문회 중에 조후보의 부인을 기소하였다. 윤석열 총장을 적임자라고 옹호하였던 여당은 검찰이 정치에 개입한다고 반발했고, 청문회에서 윤총장을 강하게 몰아붙이던 야당은 이제 검찰을 응원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검찰개혁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를 둘러싼 검찰청, 법무부, 청와대, 여야의 힘겨루기가 얽히고 섥힌 모양새다. 검찰의 수사와 법원의 판단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게 되었다. 정치문제를 정치로 풀지 못하고 스스로 모가지를 검찰의 칼날에 맡기는 어리석음이여…

윤석열 검찰총장의 인생은 굴곡졌다. 2003년 노무현 정부에서 안희정과 감금원을 구속했고, 2008년 BBK 특검에 참여하여 이명박을 무혐의로 처리했고, 이명박 정권에서 특수통 검사로 경력을 쌓았다. 2013년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를 밀어붙이다가 좌천되어 절치부심하던 중 2016년 최순실·박근혜 국정농단 사건을 통해 화려하게 재기했다. 2017년 초에는 박근혜와 이재용을 구속하고, 문재인 정부에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임명되었다. 2018년에는 DAS의 이명박을 잡아넣고, 올해 초 사법농단의 주범 양승태를 구속하였다. 지난 7월 마침내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윤총장은 2013년 국정감사에서 황교안 법무부장관을 비롯한 검찰 수뇌부의 수사외압을 폭로하면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다. 수차례 이어진 좌천인사 불이익과 모욕을 감내했다. 그래서 정권의 휘둘림에도 굴하지 않고 엄정하게 수사하는 강골검사로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문재인 정부가 그를 파격으로 중용한 까닭이다.

한계 상황을 경험한 최소주의자

소정 선생님은 “나는 깨지도록 허용해서는 안 될 최소를 고집하는 최소주의자다”라고 적었다(2008: 481).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최소는 무엇일까? 예컨대, “성욕, 연애, 가정, 일용할 양식, 노동할 권리, 평화스러운 공동체” 등은 살아가는 누구나가 갖기를 바라는 최소이다(1986: 95). 일용할 양식은 배불리 먹을 만한 수준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지장을 주지 않을 만큼의 음식이다. 화려한 옷이 아니라 흉하지 않고 더럽지 않은 옷이다.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아니라 식구들의 생계를 이을 수 있는 일자리다. 감옥에 갖힌 자에게는 추운 날 더운 물 한 모금도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다(2008: 303).

한계인은 “최소의 것을 빼앗긴 자”이거나 “최소를 가질지 말지 하는 한계 상황에 사는 사람”이다(1986: 96). 외압에도 불구하고 엄정하게 수사해야 하는 검사의 최소한을 차마 저버리지 못한 윤검사의 모습이다. 그런 사람만이 그 최소마저도 상실된 상태에서의 존재를 음미할 능력이 있다 (96쪽). 그래서 “[최소를] 빼앗은 자를 미움으로만으로 대하지 못하는 인간의 품위”를 가질 수 있다. “최소에의 흠모를 존중시하는 이는 최소의 것을 빼앗은 이에 대하여도 최소의 것이 부여되기를 바라는 인간 본연에 대한 흠모”가 있다(96쪽). 한계 상황을 경험한 최소주의자는 최소를 빼앗은 자의 이기심에 굴종하지 않으며, 빼앗은 자를 미워하면서도 똑같이 물질을 탐하는 인간의 타락도 거부한다(96쪽). “빼앗는 이의 모습을 도저히 그의 원래의 모습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인간의 품격에 대한 외경”을 갖는다(97쪽). 한계인과 최소주의자의 인간주의이다.

윤석열의 선택과 최소주의자의 길

윤총장이 억울하게 최소를 빼앗겨 본 사람이라면, 그 한계 상황을 온몸으로 버텨낸 최소주의자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첫째, 법에서 정한 기준과 절차를 철저하게 따른다. 윗사람의 권한남용으로 고통을 겪은 사람은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둘째, 지독하게 불편부당하게 일을 처리한다. 사람이나 조직에 충성하지 않고 헌법과 국민만 바라본다. 국민 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객관적 증거로 말한다. 정치와 여론의 행방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는다. 세째, 약자의 인권을 저버리지 않는다. 최소마저 박탈당했던 자는 수구세력의 집단 매질에 내몰린 조장관 식구들을 긍휼한다. 인간 본연의 품격을 거부하지 못한다. 짐승에게 먹이를 던져주듯 피의사실을 흘리지 않고 최소한의 사생활은 지켜준다. 극악무도한 피의자라도 누려야할 최소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네째, 엄정한 수사에 집중할 뿐 유불리나 대가를 따지지 않는다. 조장관에게 유리한 결론이 나오면 수구야당은 윤총장을 비난하고 특검카드를 들이밀 것이고 그 반대면 영웅으로 치켜세우고 청와대로 몰려갈 자들이다. 여당은 그 반대일 것이다. 칼자루를 쥔 자의 마음이 흔들리면 자신이 휘두른 칼날에 베이기 십상이다. 윤 총장의 선택이 한계 상황을 겪은 최소주의자가 걷는 길이길 바란다.

인용하기: 박헌명. 2019. 윤석열의 선택과 최소주의자가 걷는 길. <최소주의행정학> 4(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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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과 최소주의

고대생의 촛불집회와 배부른 자의 투정

조국 전 정무수석이 지난 달 9일 법무부 장관으로 지명되었다. 수구 야당의 파상공세 속에 인사청문회가 열리는 지금까지 관련기사가 무려 120여만 건에 이른다고 한다. 황당한 수치다. 청문회를 앞두고 조후보자의 식구들과 관련된 압수수색이 전격적으로 단행되고 있다. 시시각각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나오고 입과 입을 거치면서 자가발전하고 있다. 애초에 제기된 조후보자 여식女息의 포르쉐나 특례입학이나 성적 문제는 벌써 갑오경장 시절 얘기가 되었다. 청문회 정국이 요동치고 점입가경이다.

고대생의 촛불집회가 불편하다

조후보자의 도덕성 논란은 자신이 아닌 여식의 입학과 장학금 문제에 집중되었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과 “강남좌파”라는 조후보자의 언행이 다르다는 배신감이다. 특히 20대의 지지율이 흔들리면서 여당도 우려하고 있다. 지난 달 23일에는 서울대와 고대 학생들이 촛불집회를 열어 항의했다. 부산대 학생들도 거들고 나섰다. 조후보자의 여식이 고대 생명공학부에 입학하고, 서울대 환경대학원과 부산대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장학금을 받은 것이 입시부정이나 특혜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나는 촛불을 들고 고대 본관 앞을 도는 학생들의 행렬을 보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학생들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그 행동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이미 3차 집회가 예정되어 있다. 과연 꼭 필요한 행동이었을까? 70-80년대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던 선배들을 잇는 행동인가? 폭정에 시달리던 32년 전 고대 교수들이 목숨을 걸고 시국성명서를 낭독했던 그 자리 아닌가. 그 간절한 말이 사람들을 울려서 끝내는 6월 민주화운동으로 타오르게 했던 역사의 현장 아닌가.

소정의 최소주의에서 벗어난 촛불집회

소정 선생님의 비폭력은 최소주의로 구현된다. “일단 그 날이 오면 다칠 것을 알면서도 몸을 던지는 행동”으로 “긴요한 최소행동”이다(1991: 25-26). 첫째, 정국이 극도로 무서울 때에 행동한다. 행동을 하면 힘센 자에게 불이익을 당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대부분 몸을 사리는 상황이다. 둘째, 그래서 신중하게 행동방법을 결정한다. 참여자 간의 철저한 합의와 일반 시민과의 연대를 모색한다. 세째, 필연적으로 비폭력 방법을 취한다. 주먹이 아닌 말로 대응하되 지극히 옳은 말만 한다. 상대방의 이성조차 감히 거절하지 못할 만한 진리를 말해야 한다(2008: 66). 네째, 이말 저말을 함부로 쏟아내지 않고 꼭 필요한 요구만 한다. 실존적 발언을 최소한으로 한다(1996: 56). 무섭지 않을 때는 아무나 나와서 인기를 끌 만한 발언을 난사하기 때문에 전투력이 분산된다. 마지막으로 행동을 통해 개인의 잇속을 차리지 않는다. 기분나빠서 나서는 것이 아니라 다칠 줄을 알면서도 대의를 위해 자기를 희생할 뿐이다.

하지만 고대생의 촛불집회는 최소주의와 거리가 멀다. 첫째, 다칠까봐 몸을 움츠리는 무서운 때가 아니다. 집회에 참석한다고 해서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거나 경찰에 잡혀갈 일이 없다. 오히려 사회분위기에 편승해 주목받고 박수를 받을 일이다. 지난 달 29일 TBS <뉴스공장>에 출연한 유시민씨는 “근데 의사표현을 못하게 막고 있나요, 아니면 권력으로 이 문제제기를 틀어막고 있나요? 여론은 압도적으로 조국에게 불리하고, 언론은 대통령에게 비판적이고, 언론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건의 기사들을 쏟아내서 조국을 공격하고 있는 이 마당에… 우리가 진실을 말해야 될 때, 이것을 비판하면 불이익이 우려될 때, 익명으로 신분을 감추고 투쟁을 하거나 마스크를 쓰거나 그러는 거지. 지금 조국 욕한다고 해서, 대통령을 비난한다고 해서 누가 불이익을 줘요?”라고 말했다.

둘째, 아무리 온라인 광장에서 논의되었다지만 신중한 행동이 아니다. 집회발의자, 합의과정, 대표성 모두 흠결이 있다. 사실확인도 되지 않았는데, 숨쉴 틈도 없이 몰아치는 의혹과 비난 광풍에 휩쓸린 느낌이다. 더구나 민감한 고대 교우의 일을 어찌 그리 성급하게 말하는가. 의혹이 사실이 아니면 그 생채기를 다 어찌 하려는가? 학내 문제라며 외부인 개입을 배제했지만, 국민 다수에게 공감을 얻기 어려운 속내임을 암시할 뿐이다. 세째, 촛불시위라는 비폭력을 동원한 것은 맞지만 지극히 옳은 발언을 한 것은 아니다. 특정 사안에 대한 의혹이나 예단이지 직선제 개헌과 같은 시대정신이 아니다. 네째, 긴요한 최소한의 발언이 아니다. 학교당국이 살펴보겠다고 했고 검찰이 조사하고 있는 마당에 지레 평등·공정·정의가 사망했다고 단정하고, 자료공개, 진실규명, 입학취소, 지명철회 등을 요구하는 것은 과하다. 홀로 선 조국을 난타질하는 분위기에 편승하여 숱가락을 얹는 인기영합에 가깝다.

마지막으로 촛불집회로 얻으려는 대의가 보이지 않는다. 정의를 말하고 공정을 말했지만, 속내는 직접적인 자신의 잇속이다. 자신은 힘들게 공부해서 입학했는데, 부정하게 입학했다면 부당하다. 감히 고대에서… 한마디로 기분나쁘다는 것이다. 유시민씨는 “자격이 의심스러운 자가 기득권을 누리거나,.. 우리들의 자부심에 손상을 주는 사람이 있다고 느낄 때, 그것에 대해 비판하는 감정을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을 굳이 집단적으로 표출시킬 이유가 있나 싶어요?”라고 일갈했다. 학생들이 자문해야 할 대목이다. 어쩌면 SKY의 관점이 아닌 일반 청년의 시각에서 대학입시 제도에 대한 성찰과 개선을 말했다면 차라리 덜 부끄러웠을 것이다.

배부른 자의 밥투정이나 힘자랑

기득권의 부도덕과 특혜라고 비난했지만 고대생의 촛불집회는 또다른 기득권을 상징한다. 토익과 AP 만점자도 자질을 의심받는 범접할 수 없는 학교라는 것 아닌가. SKY의 힘자랑이다. 배불러 터진 자들의 밥투정이자 난동이다. 그냥 속상한 자들이 술집에 모여서 육두문자를 안주삼아 주사부릴 얘기 아닌가. 간절함이 없으니 감동도 없고 호응도 없다. 신중치 못한 행동이 의도찮게 수구세력의 필사항전을 편들고 대의를 호도하는 것은 아닌지…

인용하기: 박헌명. 2019. 고대생의 촛불집회와 배부른 자의 투정. <최소주의행정학> 4(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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